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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죽음과 삶, 1915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길을 간다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요? 어두운 배경을 바탕으로 왼쪽에는 무시무시한 해골이 서 있습니다. 손에는 몽둥이처럼 보이는 커다란 촛대를 들고 있네요. 옷에는 십자가가 가득 새겨져 있고요. 해골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데, 바로 인간의 전 생애가 단계별로 보이는 이미지입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꿈을 꾸듯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데요. 발그레한 볼을 보면 좋은 꿈을 꾸면서 행복해하는 것 같기도 해요. 색감도 밝고 화사해서 더욱 그렇게 보이죠. 그런데 사실 이 작품은 어머니가 사망한 이후 그린 것이랍니다. 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만 5년이 걸렸죠. 클림트는 아버지, 동생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까지 겪은 이후로 삶과 죽음을 다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어떠한가요? 삶에는 ..

미술 2023.06.10

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1609

당신의 옛날이 지금의 당신을 본다면?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칼집에서 빼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일어나서 소리 지르며, 블레셋 사람들을 쫓아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고, 블레셋 사람들의 부상자들은 사아라임 가는 길에서부터 가드와 에그론까지 엎드려졌더라.” (사무엘상 17장 51절~52절) 그림을 보면 평범한 다윗과 골리앗의 그림 같다. 그런데 카라바조는 다윗의 얼굴에는 젊었을 때의 자신을 그려 넣었고, 골리앗의 얼굴에는 현재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한마디로 이 그림은 젊은 카라바조가 애처롭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성찰의 그림이다. 자신의 삶이 어찌나 비루하고 초..

미술 2023.06.09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 세한도, 1844, 그 후의 이야기

당신 주변에는 이러한 사람이 있는가? 추사가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중국 학계와 교유를 이어가며 왕성한 독서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제자 우선 이상적(李尙迪1803~1865)의 역할이 매우 컸다. 당시 조선 중인 사회에서 가장 뛰어난 역관이자 시인이었던 이상적은 유배지에서 추사의 학문과 예술이 한층 더 나아갈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두 번이나 제주 유배지를 방문했으며 추사의 다양한 요구를 투정 한 번 하지 않고 들어주었다. 의 발문(跋文)에 의하면, 1843년에 중국에서 과 《대운산방집(大雲山房集)》 두 책을 구해 부쳐주었고, 1844년에는 하장령이 편찬한 총 120권 79 책에 달하는 방대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을 사서 보냈다. 심지어 이상적의 아우가 중국에 간다는 소식을..

추사 김정희 2023.06.08

장클루에,프랑수아 1세,1530

프랑스인이 가장 사랑하는 왕은 누굴까? 프랑스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왕은 루이 14세도, 나폴레옹도 아닌 바로 이 초상화 속 인물인 프랑수아 Fançois 1세. 프랑수아 1세는 문화와 예술을 사랑한 왕으로 당시 예술의 꽃을 피웠던 이탈리아를 동경하며, 많은 예술가를 프랑스로 초청했다. 그렇게 프랑스로 넘어온 대표적인 예술가 중 하나가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프랑수아 1세는 다빈치를 위해 근처에 클로 뤼세 Clos Luck 라는 성을 마련해주었고, 다빈치는 이곳에서 3년여를 보내다 생을 마감했다. 이는 현재 〈모나리자〉를 비롯한 다빈치의 작품들이 그의 고향인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걸려 있는 이유이다.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의 르네상스를 이끌었고, 이후..

미술 2023.06.07

펠리페4세, 벨라스케스, 1623

펠리페 4세는 1621년 3월31일 스페인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당시 유럽의 패권을 프랑스와 영국, 네덜란드와같은 나라에 빼앗기긴 했지만, 스페인의 위상은 아직도 높았다. 동쪽으로는 필리핀에서 서쪽으로는 남아메리카까지의 거대한 영토의 통치자라 해서 행성왕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 이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 1599년 스페인 세비야에서 태어났다. 벨라스케스가 태어났던 시기의 스페인은 지기 하루 전의 꽃 같았다. 활짝 피어 있고 향기도 가장 강하지만, 밤이 지나면 곧 시들어 버리고말듯한 꽃. 1492년 신대륙에 도착한 것으로 시작된 아메리카와의 무역으로 인해 엄청난 재화가 스페인으로 들어왔다. 16세기에는 해상전에서 영국에 패배하..

미술 2023.06.06

스테반의순교, 루벤스, 1616

당신에게는 오늘 어떤 삶의 이유가 있습니까?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 예수님, 제 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말하기를 ‘주님, 이 죄를 이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 7:59-60) 삶의 이유 너에게 생명 있다는 것 삶의 이유 너에게 소망 있다는 것 삶의 이유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것 이것이 너의 참된 삶의 이유 내 삶의 발걸음을 통해 또 다른 영혼이 변화되는 증거를 체험하는 영적 인플루언서의 삶을 소망해본다. #스테반의순교, 1616-17,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유화, 172X 109#빌리그래함 #1973년 #한국 #여의도 #전도집회 #50주년 #스데반 #사도행전 #삶의이유 #복음의비밀

미술 2023.06.05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 석란도 대련, 흥선대원군, 1891

흥선대원군이라고 하면 경복궁 복원과 쇄국정책을 먼저 생각하지만 석파 이하응(李應)이라고 하면 으레 그의 유명한 난초 그림을 떠올린다. 석파는 추사에게 난을 배웠고 추사는 그의 난초 그림을 높이 평가했다. 석파가 추사를 처음 찾아간 것은 1849년으로 석파 30세, 추사 64세였다. 이때 추사는 9년간의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막 풀려나 한강변 강상(江上)의 초막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석파가 난초를 배운 지 불과 2년도 안 되어 추사는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 가게 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1852년 여름, 추사가 유배에서 풀려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으로 돌아왔을 때 석파는 그동안 익힌 난초 그림을 추사에게 보내어 품평을 부탁했다. 이에 추사는 석파의 난초 그림을 극찬했다. 석파의 난에는 까슬까슬한..

추사 김정희 2023.06.04

파블로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1907

당신은 다양한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가? 피카소는 1900년에 처음 파리로 왔을 때는 스페인적인 사실주의 화풍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파리 시절 로트레크 영향으로 밝은 인상파의 화풍으로 변화했다. 피카소는 20세이던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우울하고 비참한 파리의 하층계급을 주로 그린 '프러시안 블루의 청색시대'를 거쳐, 이후 분홍색을 많이 사용한 '장미 시대(Rose Period)'를 거쳤다. 피카소는 1904년 23세에 파리 몽마르트에 정착했고, 이후1905년부터 파리 화단에서 인정받아, 기욤 아폴리네르와 교우관계를 유지하고 마티스와도 어울렸다. 1906년경부터는 세잔의 그림과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원시 미술, 특히 고대 이베리아 조각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 형태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피카소는 190..

미술 2023.06.03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 추사의 자화상, 조선 19세기

당신의 절정기는 언제쯤일까? 추사 김정희의 과천 시절은 북청 유배를 다녀온 후 1852년 10월부터 1856년 서거하기까지로, 추사 학예의 절정기에 해당한다. 천신만고 끝에 북청에 들어가 추사가 머물게 된 곳은 ‘북청 성동(城東)의 화피옥(樺皮屋)이라고 했다. 화피옥은 자작나무 껍질로 이어 붙여 지은 굴피집이다. 추사는 북청 유배에서 풀려나 별세할 때까지 4년간 말년을 과지초당(瓜地草堂)에 머물며 학문과 예술의 절정기를 보냈다. 과지초당은 그의 생부 유당 김노경이 한성판윤 시절 청계산 북쪽 옥녀봉 아래에 마련한 곳이다. 추사의 과천생활이란 평범의 연속이었다.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독서하고,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치고, 글씨를 쓰고, 벗들을 찾아가고, 벗의 방문을 받고, 그 이상이 없는 매우 담담하고 조..

추사 김정희 2023.06.01

피카소, 게르니카, 1937

피카소는 1937년 1월에 스페인 공화 정부에게서 파리 엑스포에 출품할 작품을 의뢰받았다. 그런데 당시 4월에 스페인 공화정 정부에 반대해 쿠데타를 일으킨 프랑코 장군의 요청으로 나치가 바스크지방의 작은 마을인 게르니카를 폭격했다. 비무장 시민들을 상대로 한 만행으로 약2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피카소는 이 소식을 듣고 곧 작품의 주제를 바꿔서 한 달만에 끝냈다. 당시 그의 연인이자 피카소의 그림 모델이었던 사진가 도라 마르(Dora Maar, 1907년~1997년)가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가로 7.8m, 세로 3.5m에 육박하는 이 거대한 작품을 단지 5주 만에 그렸다는 건 정말 놀라운 사실이다. 그는 이 놀라운 집중력으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인류의 양심에 호소하는 세기의 ..

미술 20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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