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이라고 하면 경복궁 복원과 쇄국정책을 먼저 생각하지만 석파 이하응(李應)이라고 하면 으레 그의 유명한 난초 그림을 떠올린다. 석파는 추사에게 난을 배웠고 추사는 그의 난초 그림을 높이 평가했다.
석파가 추사를 처음 찾아간 것은 1849년으로 석파 30세, 추사 64세였다. 이때 추사는 9년간의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막 풀려나 한강변 강상(江上)의 초막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석파가 난초를 배운 지 불과 2년도 안 되어 추사는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 가게 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1852년 여름, 추사가 유배에서 풀려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으로 돌아왔을 때 석파는 그동안 익힌 난초 그림을 추사에게 보내어 품평을 부탁했다. 이에 추사는 석파의 난초 그림을 극찬했다.
석파의 난에는 까슬까슬한 맛도 있고 유려한 리듬도 있다. 난초 잎이 휘어지는 것은 사마귀 머리 같다고 해서 당두(頭)라고 하고 끝이 뻗어나가는 것은 쥐 꼬리 같다고 해서 서미(鼠尾)라고 하는데 석파는 당두에 예서법, 서미에 초서법을 구사했다. 그래서 긴장감과 서정이 동시에 살아난다. 석파가 사용하던 많은 문자도장 중에 난초 그리는 뜻을 강조한 것이 둘 있다. 이 도장에 석파 난의 본색이 담겨 있다.
寫蘭作意 喜氣寫蘭
난을 그리면서 뜻을 일으킨다
기뻐하는 기운으로 난을 그린다
석파는 난초 그림뿐만 아니라 시도 잘 지었고, 글씨도 잘 썼고, 독서도 많이 했다. 그가 즐겨 사용한 문자도장에는 이런 멋진 문구가 있다.
讀未見書 如逢良士
아직 보지 못한 책을 읽을 때는
어진 선비를 만나듯 하고
讀己見書 如遇故人
이미 본 책을 읽을 때는
옛 벗을 만나듯 한다
어떠한가?
석파의 그 파란만장했던 이력을 대한민국 사람이면 제법 알고있지 않던가?
그가 남겼던 글귀를 전해본다.
有酒學仙 無酒學佛(유주학선 무주학불)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운다
인생의 여유와 허허로움을 느끼게 하는 명구가 아닐 수 없다.
#석란도 대련/이하응(1820~1898)/비단에 수묵/각 123.0×32.2cm/국립중앙박물관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서울2
#석파 #이하응 #흥선대원군 #석란도
#有酒學仙無酒學佛
'추사 김정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 추사의 초상화, 1857 (0) | 2023.06.18 |
---|---|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 세한도, 1844, 그 후의 이야기 (0) | 2023.06.08 |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 추사의 자화상, 조선 19세기 (0) | 2023.06.01 |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 세한도, 1844 (0) | 2023.04.25 |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 세한도, 논어, 장무상망, 1844 (0) | 2023.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