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 추사의 자화상, 조선 19세기

풍선(balloon) 2023. 6. 1.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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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절정기는 언제쯤일까?

추사 김정희의 과천 시절은 북청 유배를 다녀온 후 1852년 10월부터 1856년 서거하기까지로, 추사 학예의 절정기에 해당한다.

천신만고 끝에 북청에 들어가 추사가 머물게 된 곳은 ‘북청 성동(城東)의 화피옥(樺皮屋)이라고 했다. 화피옥은 자작나무 껍질로 이어 붙여 지은 굴피집이다.

추사는 북청 유배에서 풀려나 별세할 때까지 4년간 말년을 과지초당(瓜地草堂)에 머물며 학문과 예술의 절정기를 보냈다. 과지초당은 그의 생부 유당 김노경이 한성판윤 시절 청계산 북쪽 옥녀봉 아래에 마련한 곳이다.

추사의 과천생활이란 평범의 연속이었다.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독서하고,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치고, 글씨를 쓰고, 벗들을 찾아가고, 벗의 방문을 받고, 그 이상이 없는 매우 담담하고 조용한 나날이었다.

귀공자로 태어나 빼어난 기량으로 학문과 예술에서 명성을 날리던 젊은 추사나, 가문에 힘입어 출세가도를 달리며 '완당바람'을 일으키던 중년의 추사나, 제주와 북청으로 귀양 가서 외로운 나날을 보내던 유배시절의 추사와는 다른 만년의 고적한 삶이다.

바로 그런 일상 속에서 추사는 오히려 평범성과 보편성의 가치를 몸으로 깨달으며 자신의 인생과 예술 모두를 원숙한 경지로 마무리해갔다.

이는 북청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지은 '촌집의 벽에 제하다'라는 시에서 아주 잘 드러난다. 이 시를 짓게 된 사연이 길고도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준다.

길가의 마을 집이 옥수수밭 가운데 있는데 두 늙은 영감 할멈이 희희낙락하게 지낸다. 그래서 영감 나이가 몇이냐 물었더니 일흔 살이라 한다. 서울에 올라가보았느냐 하니 평생 관(官)에는 들어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무얼 먹고 사는가 물으니 옥수수를 먹는다 했다. 마냥 남북으로 떠다니며 비바람에 휘날리던 신세라 노인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망연자실했다.

한그루 대머리 버들 몇 칸의 초가집에 백발의 영감 할멈 두 사람만 호젓해라. 석 자가 넘지 않는 시냇가 길옆에서 옥수수 갈바람에 칠십 년을 보냈다오. 禿柳一株屋數椽翁婆白髮兩蕭然未過三尺溪邊路玉歸西風七十年

어떠한가?

추사는 어느새 자신에게 주어진 그 쓸쓸한 삶의 조건에 익숙해져있었다. 이제 그는 거부할 수 없는 노년의 삶에서 편안히 지적하는 여유조차 갖는다.

과천시절, 추사는 빗속에 젖은 복사꽃을 보며 쏠쏠한 자신의 신세를 노래했는데, 추사는 이런 외로움과 낭만적 자적, 그리고 처연한 생의 관조 속에서 인생의 중요한 가치를 깨달았으니 그것은 평범성·보편성의 가치와 관용의 미덕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귀양살이 10년이란 세월이 그에게 선물한 더없이 값진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어떠한가?

추사의 왕성한 지식욕과 창작열, 상상을 초월하는 박학과 방대한 양의 서예 작품이 이런 열정의 소산이다.

추사는 그 불같은 내적 열정 때문에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못했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끝까지 알아내고야 말았다.

추사는 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서는 반드시 최고여야 한다는철저한 완벽주의였다. 조금이라도 부실하거나 불성실한 것을 참지 못했다. 그는 벼루 열 개가 뚫어지도록 글씨를 쓰는 엄청난 훈련을 쌓은 사람답게 제자들에게 구천구백구십구 분을 얻더라도 나머지 일 분까지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당당하게 가르쳤다.

추사의 열정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관용의 미덕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매사에 시시비비를 확실하게 따져야 했고, '알면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성미 때문에 결국 수많은 적을 만들어 끝내는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유배 가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어떠한가?

불같은 열정에 너그러운 관용이 곁들여질 때 비로소 그윽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추사는 그 관용의 미덕을 귀양살이 10년에 배웠고, 그것이 비로소 과천시절 예술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사실 관용이란 기본적인 인생의 자세이지만 알아도 행하기가 어려운 법이지않던가?

남은 인생동안, 일상의 평범함과 보편성, 관용이라는 가치를 깨우치는 순간, 당신은 추사 김정희라는 천재를 닮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정희자화상, 종이에 담채, 32×23.5㎝, 19세기. 선문대박물관 소장

#추사김정희(金正喜, 1786년 ~ 1856년)
#산은높고바다는깊네 #유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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