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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글 184

자화상, 루벤스, 1623

한 사람의 일생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사진이 없던시절, 초상화 특히 자화상은 한 사람의 인생을 알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바로크(Baroque), 포르투갈어로 ‘뭉개진 진주’,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15세기를 거쳐 16세기가 저물어 갈 즈음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가톨릭으로의 부활을 부르짖는 구교도들의 외침이 유럽을 뒤흔들었다. 건축과 미술, 음악 등 예술 분야에 있어서도 조화와 균형, 인간미를 강조한 르네상 스풍에 맞서 거대한 스케일의 웅장함 속에 자유분방함과 불규칙성을 강조한 바로크풍이 새롭게 대두한 것이다. 바로크 음악의 최전선에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가, 건축에 에를라흐(Johann Bernhard Fisc..

미술 2023.08.13

마사초, 에덴에서의 추방, 1427

당신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모든 아름다운 것을 낙원에 둔 채 눈물을 흘리며 쫓겨남을 재촉당했던 아담과 이브의 고통이 느껴지는가? 추방(Expulsion) 인간다움의 시작,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지금의 우리와 만났다. 삶은 흔들린다. 어쩌면 그 흔들림으로인하여 서로를 위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떠한가? 흔들림없는 삶, 그것이 어찌 인간의 삶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 흔들림에 위로를 더할 수 있다면, 당신이 있는 그곳이 우리가 추방되었던 낙원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당신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마사초,,1427년, 208x88cm,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교회의 브란카치 예배소, 피렌체#마사초 #에덴에서의추방 #Expulsion #인간다움의시작

미술 2023.08.12

앵그르, 샤를 7세 대관식의 잔다르크, 1854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간 벌어진 백년전쟁은 영국과 프랑스의 거주민들에게 국가에 대한 확고한 애국심을 심어 주는 원동력으로작용했다. 원래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권 경계는 매우 모호했으며, 노르망디 공 월리엄이 영국 왕위를 찬탈한 이래로 영국 궁정은 계속 프랑스어를 사용해 왔다. 노르망디의 지배권 역시 영국 왕실에 있었다. 전쟁의 발단은 노르망디와 플랑드르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일어난 영국과 프랑스 간의 다툼이었다. 양모를 생산하던 영국인들은 이를 가공하기 위해 플랑드르의 발달한 모방직 산업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영국인들은 대륙 침략 전쟁을 열렬히 지지했다. 1337년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며 필립 6 세에게 도전했을 때 영국은 유럽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346년,..

미술 2023.08.08

아무도기다리지않았다, 일리야레핀, 1844

당신의 삶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이방인 가족들은 마치 낯선 이방인처럼, 자신의 아들을, 자신의 남편을,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맞이하고 있다. 두려움과 조심스러움, 경계심과 놀라움을, 러시아의 화가,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회화의 거장, 일리야 레핀(1844-1930)은 그려내고 있다. 농노 제도의 폐지 이후, 러시아 농민의 삶은 이미 피폐함 그 자체였다. 이에 계몽이라는 명분으로 교사, 의사, 점원, 노동자가 앞장서서, 러시아의 기반인 농민 공동체를 기초로,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로 이행이 가능하다고 믿고 그들은 '브 나로드(v narod)'운동을 펼쳤다. 화가 레핀은 "이방인", 오랫동안 부재하던 가족이며 누군가의 급작스러운 출현과 갑작스러운 등장 그리고 긴장이 깨지지 않은 상태를 ..

미술 2023.08.06

짐베르크, 부상당한천사, 1903

당신의 오늘은 안녕하신가? 핀란드의 상징주의 화가 유고 짐베르크Hugo Simberg의 , 부상당해 혼자 걸을 수 없는 천사를 아이들이 들것으로 옮기고 있다. 천사는 흰 천으로 눈을 가렸고 아이들은 심통이 난 표정이다. 부상당한 천사, 보지 못하고 날 수 없으며, 걷지도 못하는 천사. 120여년전 핀란드의 화가, 짐베르크의 이 그림이 혹시나 대한민국이 처한 오늘의 현실을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음은 왜일까? 어떠한가? 보지 못하고, 날 수 없으며, 걷지도 못하니 부상당한 천사와 다를 바 없는 처지다. 정신적 불구상태인 가정과 사회가 정상이라고 확신하고 오직 나만 충실하게 잘살면 된다는 주술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던가? 는 자유로운 선택과 시행착오의 자유와 책임조차 박탈당한 한국의 자화상이 아닐까? 더..

미술 2023.08.05

자화상, 렘브란트, 1659

인생의 내리막길 화가로서 렘브란트의 명성은 그의 생각대로 나날이 높아져 갔지만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화가의 이후 인생이 탕자 이야기처럼 나타난 것은 가정사에서였다. 사스키아의 부친이 사망한 후 아내 몫의 유산을 제대로 받기 위해 그는 처가 식구들과 소송을 해야 했다. 그 후에 그는 자신의 낭비벽을 비난한 처가 친척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기도 했다. 그런 소송전 가운데 아내는 세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연달아 어려서 죽고 말았다. 넷째는 다행히 살았지만 이번에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결혼한 지 8년 만에 아홉 달 젖먹이 아들 티투스를 두고 떠난 아내를 대신해 집에 들어온 유모 헤르트헤 디르크스는 곧 그의 정부가 되었다. 5년 후에 새로 들어온 가정부 헨드리키에 스토펠스가 새로운 정부가 되자, 헤르트헤는..

렘브란트 2023.08.01

연암 박지원(朴趾源)초상, 18세기 조선

왜 하늘 천天 자는 푸르지 않습니까? 마을의 어린애에게 천자문을 가르쳐 주는데, 게으름을 피우며 읽기를 싫어하기에 한마디 나무랐더니, 그 애가 “하늘을 보니 푸르고 푸른데 ‘하늘 천’(天) 자는 왜 푸르지 않습니까? 이 때문에 천자문 읽기가 싫은 겁니다.”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아이의 총명함은 한자를 만들었다는 중국의 창힐을 기죽게 할 정도입니다. 어떠한가? 18세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태두 연암 박지원선생, 창의란 무엇인가? 아이가 눈으로 본 하늘과 글로 본 하늘이 다름을 이야기할 그 때, 비로소 새로운 시작, 창의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선생은 18세기 조선사회의 르네상스적 변화, 북벌과 북학의 행간에서 사유와 방법론의 갈등을, 옛것을 본받는 일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에 대..

미술 2023.07.31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 대팽고회大東高會

당신의 마지막 때, 어떠한 마음을 남길 것인가? 1840년 제주도에 위리안치된 55살의 추사는 이년후 부인상을 당하고, 1848년 12월에 풀려났지만 66살에 다시 함경도 북청에 유배 일년후인 1852년 과천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다 71살에 영면했다. 김정희는 파란만장한 생애의 마지막 경기도 과천에서 보냈다. 유배에서 풀려난 1852년부터 그는 청계산과 관악산 사이에 있는 주암동에 부친이 지은 초당에서 마지막 4년을 보냈다. 그가 죽은 해인 1856년에 쓴 《대팽고회大東高會》는 평생 익힌 기교와 기름기를 모두 걷어내고 담백한 글씨체로 썼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쓴 대련(對聯)의 구절이다. 최고의 반찬은 두부·오이·생강·나물이고, 최고로..

추사 김정희 2023.07.30

김환기, 어디서무엇이되어다시만나랴, 1970

고향, 당신에게는 무엇입니까? 김환기는 뉴욕시절 단색으로 점 하나를 찍고 네모꼴로 둘러싸는 것을 서너번씩 하며 물감이 번져나가게 하기를 수행하듯이 수천 번 반복한다. 무엇이 이러한 수고와 인내를 가능하게 했을까? 이 작품들은 결과적으로 서양의 모노크롬처럼 보이지만, 그가 작품을 통해 담아내고자 한 건 개념적인 게 아니라 바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고향의 자연을 무척이나 사랑했던 그는 삭막한 뉴욕에서 고향의 자연 산천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만 갔다. 산이 없어서 마천루의 고층 건물 위쪽으로 해가 저무는 삭막한 뉴욕에서 낭만을 잃어버린 그가 의지할 곳은 오직 밤하늘의 별이었다. 밤하늘의 별만큼은 고향에서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뉴욕의 작업실에서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종신수처럼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

김환기 2023.07.26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 불이선란도, 19세기

불이법문(不二法門), 당신은 그 아름다움을 아시는가? 조선 말의 대학자이자 서화가인 추사는 서예에서 추사체를 창안했을 뿐만 아니라 묵란화에서도 높은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가 사군자 중에서 특히 난초를 즐겨 그린 이유는 난초를치는 것이 서예에 가깝기 때문이다. 아들 상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난초 그리기는 서예의 예서와 가깝고 '문자향서권기'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조언했다. 난초를 치는 법은 또한 예서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은 다음에야 얻을 수 있다. 또 난초를 치는 법은 그림 그리는 법식대로 하는 것을 가장 꺼리니, 만약 그러한 법식으로 쓰려면 일필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난초가 사군자 중에서 그리기 어려운 이유는 형태가 너무 단순하여 선 몇 개로 완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추사 김정희 2023.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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