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앵그르, 샤를 7세 대관식의 잔다르크, 1854

풍선(balloon) 2023. 8. 8.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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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간 벌어진 백년전쟁은 영국과 프랑스의 거주민들에게 국가에 대한 확고한 애국심을 심어 주는 원동력으로작용했다.

원래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권 경계는 매우 모호했으며, 노르망디 공 월리엄이 영국 왕위를 찬탈한 이래로 영국 궁정은 계속 프랑스어를 사용해 왔다. 노르망디의 지배권 역시 영국 왕실에 있었다.

전쟁의 발단은 노르망디와 플랑드르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일어난 영국과 프랑스 간의 다툼이었다. 양모를 생산하던 영국인들은 이를 가공하기 위해 플랑드르의 발달한 모방직 산업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영국인들은 대륙 침략 전쟁을 열렬히 지지했다.

1337년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며 필립 6 세에게 도전했을 때 영국은 유럽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346년, 에드워드 3세는 1만 명의 궁수와 4천 명의 기사를 데리고 노르망에 상륙했다.

백년전쟁에 대항하는 프랑스의 전력은 보잘것없었다. 프랑스군은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1만 명 이상의 전사자를 냈다. 설상가상으로 왕실 내에서 왕위 다툼이 벌어져 두 개의 왕당파가 프랑스를 양분했다.

한쪽은 영국 왕 헨리 6 세를 프랑스 왕으로 옹립하려 했고, 다른 한쪽 샤를에게 왕위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왕세자가 국왕으로 즉위하기 다시는 랭스대성당에서 축성을 받아야 했으나 왕세자는 모후 이사보가 부정을 저질러 낳은 혼외 자식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때 홀연히 나타난 열일곱 살의 처녀 잔다르크 (1412-1431)가 프랑스군을 이끌고 오를레앙과 랭스를 수복하면서 왕세자는 대관식을 거쳐 샤를 7세로 즉위했다.

1430년 오를레앙이 잉글랜드군에게 함락되고  오를레앙을 지키던 잔 다르크도 포로가 되었고 잉글랜드는 이를 이용하여 샤를 7세에게 그녀의 몸값을 요구하였으나 지금까지 자신에게 많은 승리를 안겨준 잔 다르크를 매정하게도 몸값이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매몰차게 버린다.

자신과의 생각과 입장이 전혀 반대인 강경입장을 취하고 있는 그녀가 잉글랜드군에 잡혀 포로가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매몰차게 버렸던 것이다. 결국 잔 다르크는 잉글랜드에서 마녀라는 혐의를 받아 1431년 5월 화형을 당하게 된다.

샤를7세는 잔다르크의 효용가치를 본인이 황제로 등극하는데까지로 판단하였고, 잔다르크가 화형되는 과정을 그저 방관하기만 했다. 아무튼 잔다르크의 등장으로인해 전세는 급격히 프랑스로 기울었다. 1453년에는 칼레를 제외한 대부분의 프랑스 영토가 수복되었다.

백년전쟁은 영국과 프랑스인들에게 양국 간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게 만들었다. 잔다르크는 애국심의 상징으로 프랑스인들에게 남았고, 오랜 전쟁으로 인해 봉건 영주의 기사단은 몰락했다. 왕은 세금을 걷어서 자신의 군대를 육성했다. 그후 양국에는 강력한 전제군주가 출현했다.

사람의 마음이 다 이런 것일까?

자신을 황제의 대관식으로 인도해주고 강력한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프랑스의 승리를 이끌어낸 잔다르크가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니!

#앵그르,‘샤를 7세 대관식의 잔다르크’,1854,캔버스에 유채, 240x178cm,루브르 박물관.

#백년전쟁 #영국과프랑스 #잔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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