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자화상, 렘브란트, 1659

풍선(balloon) 2023. 8. 1. 13:25
728x90
반응형


인생의 내리막길

화가로서 렘브란트의 명성은 그의 생각대로 나날이 높아져 갔지만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화가의 이후 인생이 탕자 이야기처럼 나타난 것은 가정사에서였다. 사스키아의 부친이 사망한 후 아내 몫의 유산을 제대로 받기 위해 그는 처가 식구들과 소송을 해야 했다. 그 후에 그는 자신의 낭비벽을 비난한 처가 친척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기도 했다.

그런 소송전 가운데 아내는 세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연달아 어려서 죽고 말았다. 넷째는 다행히 살았지만 이번에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결혼한 지 8년 만에 아홉 달 젖먹이 아들 티투스를 두고 떠난 아내를 대신해 집에 들어온 유모 헤르트헤 디르크스는 곧 그의 정부가 되었다. 5년 후에 새로 들어온 가정부 헨드리키에 스토펠스가 새로운 정부가 되자, 헤르트헤는 렘브란트가 결혼하기로 한 약속을 어겼다며 고소했다.

사스키아는 죽으면서 남편이 재혼할 경우 재산의 반을 아들에게 양도해야 한다는 내용의 유언을 남겼는데, 그 때문인지 그는 동거녀 헨드리키에와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

윤리적으로 이렇게 흠집이 많이 난 렘브란트의 다음 시련은 경제적인 부분에서 왔다. 그에게 일이 끊긴 적은 없었지만 1650년대에 접어들자 화가로서의 명성과 수입은 예전같지 않았다.

1652년에는 영국-네덜란드 전쟁까지 시작되어 나라 전체가 불경기를 맞았고, 렘브란트는 늘어나는 채무조차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1656년에 파산 선언을 하고 만다. 곧이어 집과 그림, 수집품 등 전재산이 경매에 부쳐졌으나 빚을 다 청산하지 못했다. 그는 자기 이름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어 아들과 동거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아서 1662년에는 사스키아의 묘지터까지 팔아야 했다.

그 이듬해부터 암스테르담에 페스트가 돌았는데, 그 전염병에 헤드리키에가 목숨을 잃었다. 1668년에는 26살밖에 안 된 외아들까지 페스트로 세상을 떠났다. 네덜란드 황금시대 최고의 화가였던 렘브란트가 어느 사이에 아내도 없고,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끝에 헤매이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소유에서 존재로

렘브란트는 그림으로 자서전을 썼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자화상을 많이 남겼다. 파산과 사별을 겪은 그가 다음 역할을 맡게 되었을 때, 셰익스피어식으로 말해 이전 배우가 퇴장하고 새 배우가 등장했을 때, 그 둘을 같은 사람으로 볼 수 있을까? 퇴장한 배우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똑같은 사람이 분장만 바꿔서 다시 무대에 오르는 것일까?

사람이 나이를 먹을 때, 나이 어린 사람이 온전히 남아 있고 그 위에 무엇인가가 덧붙여지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으로 그 사람을 구성하는 재료 자체가 바뀐다. 인체 세포는 수명이 짧아서 계속해서 죽고 새로 만들어진다. 비교적 수명이 긴 세포로 이루어진 뼈나 근육도 15년이면 온전히 다른 세포로 교체되기 때문에, 장년의 몸속에 청년 시절의 세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생각은 어떠할까?

대개 믿지 못할 얼마간의 기억을 제외하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사람이 이전 단계의 생각을 그대로 이어받는다고 하기도 어렵다. 렘브란트의 경우를 보아도 그렇다.

젊은 렘브란트는 자기의 자랑스러운 수집품들로 분장을 하고, 그 물건들의 질감을 공들여 묘사하여 자기의 재산과 재능을 과시했다. 그러나 《1659년의 자화상》과 같은 작품을 통해 볼 수 있는 장년 이후의 렘브란트는 아무런 분장이나 소도구 없이, 그저 자기 자신으로서 화면 밖을 뚫어지게 응시할 뿐이다.

이 둘이 같은 인간일까?

모든 것을 잃은 렘브란트가 여전히 인간이기 위해서 존재 지향이 되어 “나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그 어떤 사물도 나의 삶에 의미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디에 존재하든 간에 완전히 현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만 했다.

시련 이후의 렘브란트는 그 이전과 다른 실존 양식으로서만 인간일 수 있었다.

어떠한가?

인간이 존재하는 데에 본질적이지 않은 것은 소유뿐 아니다. 인생에는 생존 이외의 목적이나 의미도 본래 없다. 그런 것을 생각하는 순간 삶은 수단이나 도구로 전락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목적을 달성하고 의미를 이루고 과제를 완수했거나, 그런 부분에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인간은 살 이유가 없다.

탁월한 생산력을 가졌다고 해서 살 이유가 특별히 더해지는 것 또한 아니다. 빌 게이츠나 노숙자나 살아야 할 이유는 똑같다.

죽음 또한 그렇지 않은가?

불시에 죽음을 맞은 사람은 쓸모를 다해서 폐기되었거나 죄가 많아 벌을 받은 것이 아니다. 렘브란트는 사스키아, 헨드리키에, 티투스의 죽음에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모두에게 똑같이 한 번으로 끝나기 때문에 우리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것이 아니라, 어떤 부분도 버릴 수 없이 소중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적 같은 선물인 삶들이 만나는 모든 것들은 즐겁지 않을 수가 없다.

성공, 행복, 명예 등은 그런 즐거움의 여러가지중 하나일 뿐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것이 아니다.

렘브란트의 삶을 표현한 자화상에서처럼,
어쩌면 삶은 사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호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말한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구좌의 잔고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가끔씩은 불안한 맘도 없진 않지만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ᆢ

https://youtu.be/HRlwPwqC-Y0

#서양미술사 #그림vs그림 #김진희
#자화상 #렘브란트 #1659년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