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구인가?
탕자의 귀향이라는 그림을 처음으로 보았던 그해, 내 영적인 여정은 세가지 단계로 나타났다.
내가 경험했던 첫 번째 단계는 작은아들이 되는 경험이었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아버지가 작은아들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품으로 가까이 끌어당기는 다정한 모습을 보자 내가 탕자처럼 길잃은, 돌아가고 싶은 아들이자 아버지의 따뜻한 품이 필요한 사람이라는걸 깊이 깨달았다.
오랜 세월 나는 나를 귀향하는 탕자라고 여겼다.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께서 나를 반겨주실 순간을 기대했다.
내 영적 여정의 두 번째 단계는 어느 날 저녁 렘브란트의 여정을 이야기하는 도중 시작되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내가 큰아들 같다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실제로 우리 집안에서 장남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비롯하여 내가 얼마나 순종적인 삶을 살아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더군다나 여섯 살일 때, 나는 이미 사제가 되고 싶어했고 이 소망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큰아들인 나는 실제로는 작은아들처럼 길 잃은 채 살았을지도 모른다. 분명 나는 큰아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작은아들만큼이나 길을 잃고 있었다.
심지어 평생을 '집'에 머물렀음에도 여전히 길을 잃은 상태였다. 집에 있다는 기쁨을 한 번도 온전하게 경험하지 못했다. 내가 받은 모든 특권에 감사하기는커녕 분노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렘브란트라는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의 고통스러운 삶에 관하여 읽었고 그의 고뇌에 찬 여정 때문에 궁극적으로 그가 탕자의 귀향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하루에도 몇 시간씩 렘브란트가 좌절, 환멸, 비탄의 한가운데서 만들어낸 훌륭한 데생과 그림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모든 것을 용서하는 연민의 몸짓으로 아들을 끌어안은 거의 실명 직전인 노인의 모습을 어떻게 렘브란트가 그려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렘브란트는 분명 그런 겸허한 하느님의 초상을 그리기 위해 수많은 죽음을 맞이하고 수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 그림 속의 아들을 끌어안은 노인을 바라봤건만, 그 노인이 내 인생의 소명을 가장 온전하게 드러내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진정한 소명을 추구할 때가 되었다. 집으로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으면서 그저 따뜻하게 환영해주는 아버지가 되는 소명,
진정한 연민에서 나오는 권위를 지닌 아버지.
어떠한가?
이 모든 마음이 헨리나우웬에 한정된 것일까?
한편으로는 온몸을 덮는 붉은 망토를 걸친 수염 난 노인을 바라보며 노인으로서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에 거리감이 느껴졌다.
우리는 아미도 낭비벽 심한 작은아들이나 분노하는 큰아들과는 동일시하는 것은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어서 더는 잃을 게 없고 줄 것만 남은 노인처럼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할 것임이 분명하다.
렘브란트는 63세에 세상을 떠났고 이미 우리는 두 아들보다는 그 나이에 더 많이 가깝지 않던가?
렘브란트는 기꺼이 아버지에게 자신을 대입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나라고 안 될 게 무엇이겠는가?
실제로 나는 작은아들이자 큰아들이고 이젠 아버지가 되어가는 중이다.
#그크신하나님의사랑
https://youtu.be/ckgQR2qk6VY
#렘브란트, 탕자의 귀향(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Oil on canvas, c. 1669. 262x206cm, Hermitage, St. Petersburg, 페터스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탕자의귀향
#집으로돌아가는멀고도가까운길
#헨리나우웬 #렘브란트
#그크신하나님의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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