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렘브란트, 켄우드자화상, 1663

풍선(balloon) 2023. 4. 17.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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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유럽여행은 렘브란트(Harmensz van Rijn Rembrandt.1606~69) 의 자화상을 보기 위해 떠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몇년 전 서울의 한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림에 매료되어 어느 잡지에 글을쓴 적이 있었다.

어떤 그림이나 글을 보고 받은 최초의 감동이 채 지워지지않은 상태에서 무엇이 어떻게 좋은가를 논하는 건 조금 위험할지도모른다. 마치 마취가 덜 깬 상태에서 입술을 움직여 말하는 것처럼 어설프고 두서가 없을 터이다.

서점에 가득한, 서로 읽어달라 아우성치는 책더미 속에서 하나의 눈빛이 내게로 왔고, 그 순간 내 속의 무언가가 무너져내렸다.

켄우드 자화상(1663~65년)에서 날 사로잡은 것은 바로 그 으스스한 시선이었다. 임빠스또(Impasto, 캔버스에 물감을 두텁게 칠하는 유화기법), 끼아로스꾸로(Chiaroscuro, 강렬한 명암대비)의 대가 등등의,

온갖 잡다한 미술사적 지식으로 무장한 나를,
단숨에 무장해제시켰던 눈.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지평선 저 너머를 이미 보아버린 사람의 눈.

이제까지 마주친 현실세계의 어떤 눈빛이 그처럼 날 오싹 뒤흔들어놓은 적이 있던가?

내 눈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영상, 바깥세상의 온갖 자질구레한 일상을 지우고 껍데기뿐인 시시한 관념들을 날려보낸 하나의 순수한 시선에 압도당한 나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작가는 고백한다.

렘브란트에 붙들린 한동안이 무한정 길어진 것은 그 무렵 내가 속이 허했기 때문이리라. 그해 여름 6년이나 끌던 대학원 졸업논문을 억지로 마무리한 뒤 나는 심한 허탈감에 빠져 있었다. 한마디로 모든게 시들했다.

나는 내가 지평선 저 너머를 이미 보아버렸다고 짐짓 한탄했다. 문학이니 학문이니 하는 것들도 아무 쓸모 없는 것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노래, 모든 몸짓에 싫증이 난 어느날 아침 나는 불현듯 여행을 꿈꾸었다. 어서 어딘가에 날 집어넣어야 살 것 같았다. 새롭고 싱싱한 삶의 실감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이 땅을 떠났다.

렘브란트는 하나의 핑계였는지 모른다. 물론 그에게서 내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 답을 듣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하지만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그를, 그의 자화상을 직접 대면해야 했다.

어떠한가?
렘브란트를 모르고 어찌 인생을 논할까?

작가의 말처럼 지평선 너머를 이미 보아버린 지금의 나로서는 삶의 허무감을 감당할 수 없고, 가야할 바를 알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보고도 알 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직접 대면해보고자 하는 이 바램은 왜일까?

어떠한가?

독일 철학자 게오르그 짐멜,

육십평생 부귀영화와 희노애락으로 점철된 렘브란트의 삶과 그림을 인용해보면,

그의 삶에 있어 모든 현재의 순간은 그 이전에 경과된 삶의 전체에 의해 규정되고 모든 선행하는 순간들의 결과이며, 따라서 이미 그러한 이유만으로도 모든 현재적 삶은 그 안에서 주체의 전체적 삶이 현실이 되는 형식이다.

어떠한가?

우리가 살고있는 현재가
왜 중요한지 이미 알고있지 않던가?
과연 내 삶의 지금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다시,
렘브란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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