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 대팽고회大東高會

풍선(balloon) 2023. 7. 30.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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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마지막 때,
어떠한 마음을 남길 것인가?

1840년 제주도에 위리안치된 55살의 추사는 이년후 부인상을 당하고, 1848년 12월에 풀려났지만 66살에 다시 함경도 북청에 유배 일년후인 1852년 과천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다 71살에 영면했다.

김정희는 파란만장한 생애의 마지막 경기도 과천에서 보냈다. 유배에서 풀려난 1852년부터 그는 청계산과 관악산 사이에 있는 주암동에 부친이 지은 초당에서 마지막 4년을 보냈다.

그가 죽은 해인 1856년에 쓴 《대팽고회大東高會》는 평생 익힌 기교와 기름기를 모두 걷어내고 담백한 글씨체로 썼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쓴 대련(對聯)의 구절이다.

최고의 반찬은 두부·오이·생강·나물이고, 최고로 행복하고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손자가 함께하는 것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가 삶의 말년에 도달한 경지는 바로 '소박'이었다. 그가 중시한 '괴'의 개념은 서양 미학의 아방가르드와 통하지만, 추사는 아방가르드처럼 맹목적 해체가 아니라 '허화졸박'의 이데아를 위한 것이다.

'허화'는 인위적인 기교를 비워 자연스러움이 저절로 드러나는 경지이고, '박'은 노자의 '대교'의 세계를 의미한다. 즉, 무위자연의 경지처럼, 자신을 비워야 소박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글씨의 근본을 예서에서 찾은 것도 예서가 '허화졸박'의 개념과 가깝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추사는 당시 서예계가 기교에 치우쳐 이러한 '허화虛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한탄했다.

요즘 사람들이 쓴 글씨를 보면 다 능히 '허화虛和'하지 못하고 사뭇 악착스러운 뜻만 많아서 별로 뛰어난 경지가 없으니 한탄스러운 일이네. 글씨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허화'에 있으니 이는 사람의 힘으로 이를 수 없는 것이요, 반드시 천품을 갖추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어떠한가?

추사가 예술의 최고 경지로 여긴 '허화'는 인위적 기교를 내려놓고 무위자연의 상태에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성이 발현될 때 가능한 경지다.

그의 평생 지우였던 초의선사는 추사의 영전에 “도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마치 폭우와 우레같이 당당했고, 정담을 나눌 때면 당신은 봄바람과 따스한 햇볕과 같았습니다.”라고 제문을 썼다고 전한다.

고통스러운 유배 생활 속에서 꽃피운 추사의 예술 세계는 오늘날 단지 서예의 장르에 국한되지 않았다. 전통적 양식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자기 양식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선생은 ‘법고창신'의 모범이 되었다.

어떠한가?

온갖 기교와 현란함으로 삶을 다채롭게 꾸밈에 진심인 선생의 사후 이백년후 이시대를 보게된다면 선생은 어떠한 마음을 우리들에게 남길 것인가?

조선조 왕가의 피붙이로 태어나 온갖 호사 속에 자라서 벼슬길에 오르고, 동아시아 최고의 학자가 된 추사 김정희,

그 양지와 음지의 71년의 온일생을 통해 끝까지 마음에 품고 바라던 바, 이 마음을 남기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

지금
당신의 삶은 어떠한가?

당신의 마지막 때,
어떠한 마음을 남길 것인가?

#추사 김정희「대팽두부大烹豆腐」,1856년, 한지에 수묵, 31.9×129.5cm,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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