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해남 윤씨였다.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증손자였고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외증조부이기도 했다. 해남 윤씨는 정치적으로 남인(南人)이었다. 13세 때 한양에 올라온 윤두서는 숙종 때인 169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그러나 이듬해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은 서인(西人)에 밀려 권력을 잃었다. 그 후 윤두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치열한 당쟁 속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동안 셋째 형 윤종서가 귀양 중에 사망했고, 윤두서 자신도 큰형 윤창서와 함께 모함에 연루돼 죽을 고생을 했다. 특히 윤두서가 이 자화상을 그리고 있었을 시기는 그에게 온갖 어려움이 겹겹이 쌓여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