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공재 윤두서, 자화상, 1710

풍선(balloon) 2023. 4. 28.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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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해남 윤씨였다.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증손자였고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외증조부이기도 했다.

해남 윤씨는 정치적으로 남인(南人)이었다. 13세 때 한양에 올라온 윤두서는 숙종 때인 169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그러나 이듬해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은 서인(西人)에 밀려 권력을 잃었다. 그 후 윤두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치열한 당쟁 속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동안 셋째 형 윤종서가 귀양 중에 사망했고, 윤두서 자신도 큰형 윤창서와 함께 모함에 연루돼 죽을 고생을 했다. 특히 윤두서가 이 자화상을 그리고 있었을 시기는 그에게 온갖 어려움이 겹겹이 쌓여 있을 때였다.

이 그림은 윤두서가 46세인 1713년쯤에 그려졌다. 그즈음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온갖 풍파에 시달리다 출세의 뜻을 꺾고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다. 그는 이런 과정에서 자화상을 그렸다.

국보 제240호 「자화상」은 그러한 사실주의적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화면 가득히 얼굴만 그린 전무후무한 양식을 도입했는데,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강렬한 윤두서의 눈빛은 실제 살아 있는 윤두서를 마주하는 듯 탁월하다. 정밀한 묘사 기법이 발휘된 수작이다.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강렬한 기를 내뿜는 그의 눈빛이다. 일차적으로 눈썹이나 눈의 모양이 호랑이상이어서 보는 이를 섬뜩하게 만들 정도로 안광을 뿜어낸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 마치 살아 있는 것같이 세세하고 생생한 묘사가 한층 더 강렬한 기운을 만들어 낸다. 보통 눈동자를 전체적으로 검게 처리하기 십상이지만 자세히 보면, 윤두서는 동공과 홍채를 구별하여 그리고 있다. 심지어 홍채의 가는 결까지 보이는 듯하다.

다음으로 그림 앞에 선 사람을 순식간에 긴장시키는 게 수염이다. 장비처럼 사방 팔방으로 뻗쳐 있는 구레나룻, 턱수염, 눈썹, 콧수염을 한 올이라도 놓칠세라 정성스럽게 그려 놓았다. 수염이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듯이 펼쳐져 있어 더욱 강한 기운을 만들어 낸다.

입술은 허튼소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을 듯이 꽉 다물고 있다. 이 모든 요소가 한데 모여 강렬한 인상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가?

언뜻 보기에 확고한 신념과 불굴의 의지로 가득 차 보이는 자화상이지만 정작 윤두서 자신은 조선 시대의 치열한 당쟁 속에서 모진 고초를 당했다.

할아버지는 윤선도, 손주는 정약용이라하니 금수저중의 금수저가 아니었겠는가?

그래서인가?

강인한 인상 뒤로 언뜻 쓸쓸함이 스친다. 우리가 윤두서의 삶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림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쓸쓸함과 고독이 언뜻 비추어지기는 했을지언정 자화상에서 절망이나 동요의 그림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눈빛이 흐려진 기억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을 것 같은 완강한 인상이다.

실제로 그는 자기 절제와 극기에 있어서 남다른 의지력을 갖추었을 것이다. 여기에 조선 사대부의 엄숙함까지 더해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인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게 아닐까?

중년의 얼굴은 오로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여정이라고하지 않던가? 오늘도 우리는 무엇으로인하여 마음의 평정을 잃고 흔들렸는가?

코로나로 항시 절반은 가려진 얼굴이겠지만, 일부러라도 큰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흔적을 느껴봄직한 봄날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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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齋 #尹斗緖 #사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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