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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10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국보 제180호, 세한도, 김정희, 1844

오늘처럼 세상이 온통 하얀 날, 당신에게도 세한(歲寒, 한겨울에도 변치 않는 푸르름)의 마음이 남아 있는가? 환갑을 바라보던 1844년 추사(완당) 김정희(1786~1856)는 제주도에서 5년째 유배생활을 하던 중에 그의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에게 그림과 편지를 보낸다. 세상의 도도한 풍조는 오로지 권세가와 재력가만을 붙좇는 것이다. 이들 책을 구하려고 이와 같이 마음을 쓰고 힘을 소비하였는데, 이것을 권세가와 재력가들에게 갖다주지 않고 도리어 바다 건너 외딴섬에서 초췌하게 귀양살이 하고 있는 나에게 마치 세인들이 권세가와 재력가에게 붙좇듯이 안겨주었다. 사마천(司馬遷)이, “권세나 이익 때문에 사귄 경우에는 권세나 이익이 바닥나면 그 교제가 멀어지는 법이다” 하였다. 그대 ..

추사 김정희 2023.12.31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 대팽고회大東高會

당신의 마지막 때, 어떠한 마음을 남길 것인가? 1840년 제주도에 위리안치된 55살의 추사는 이년후 부인상을 당하고, 1848년 12월에 풀려났지만 66살에 다시 함경도 북청에 유배 일년후인 1852년 과천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다 71살에 영면했다. 김정희는 파란만장한 생애의 마지막 경기도 과천에서 보냈다. 유배에서 풀려난 1852년부터 그는 청계산과 관악산 사이에 있는 주암동에 부친이 지은 초당에서 마지막 4년을 보냈다. 그가 죽은 해인 1856년에 쓴 《대팽고회大東高會》는 평생 익힌 기교와 기름기를 모두 걷어내고 담백한 글씨체로 썼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쓴 대련(對聯)의 구절이다. 최고의 반찬은 두부·오이·생강·나물이고, 최고로..

추사 김정희 2023.07.30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 불이선란도, 19세기

불이법문(不二法門), 당신은 그 아름다움을 아시는가? 조선 말의 대학자이자 서화가인 추사는 서예에서 추사체를 창안했을 뿐만 아니라 묵란화에서도 높은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가 사군자 중에서 특히 난초를 즐겨 그린 이유는 난초를치는 것이 서예에 가깝기 때문이다. 아들 상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난초 그리기는 서예의 예서와 가깝고 '문자향서권기'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조언했다. 난초를 치는 법은 또한 예서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은 다음에야 얻을 수 있다. 또 난초를 치는 법은 그림 그리는 법식대로 하는 것을 가장 꺼리니, 만약 그러한 법식으로 쓰려면 일필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난초가 사군자 중에서 그리기 어려운 이유는 형태가 너무 단순하여 선 몇 개로 완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추사 김정희 2023.07.22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 매화초옥도, 19세기 전반

당신은 봄을 기다리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어떠한 소식을 기대하는가? 눈 덮인 흰 산, 잿빛 하늘, 눈송이 같은 매화, 산속 초옥에서 문을 활짝 열어놓고 친구를 기다리며 피리를 불고 있는 초록빛 옷의 오경석과 화면 왼쪽 하단에 거문고를 메고 벗을 찾아가는 붉은 옷차림의 전기의 모습, 한겨울 깊은 산 속의 초옥에 홀로 거(居)하고 있는 벗을 찾아간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림 오른쪽 아래의 '역매인형초옥적중(亦梅仁兄草屋笛中,역매 오경석이 초옥에서 피리를 불고 있다)'이라는 글귀로 미루어, 초옥에 앉아 있는 인물은 역매 오경석이란 인물이고,홍의(紅衣)의 인물은 전기 자신임을 짐작한다. 둘은 즐겨 그림에 대한 심미안을 나누었던 절친한 친구로서 매화 향기는 경조부박한 외부로부터 이 초옥을 막아줄 것이고 이..

추사 김정희 2023.06.21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 추사의 초상화, 1857

한치 앞을 모르는 것이 인생인데, 당신의 죽음이후 후대가 당신을 평한다면 어떻게 쓰여지기를 바라는가? 추사의 김정희의 말년은 어떠했는가? 결국 추사는 63세인 1848년 12월 6일 만 8년 3개월 만에 유배에서 풀려났다. 벗인 조인영과 권돈인(權敦仁, 1783~1859), 제자 허련(許鍊, 1809~1892) 등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해배되었다. 이듬해인 1849년 1월 7일에 제주도 대정현 유배지를 떠난 추사는 서울로 돌아와 한강변에 머물며 계속 글씨를 쓰는 등 작품 활동을 했다. 하지만 1851년 7월 22일, 66세의 추사는 진종(眞宗, 1719~1728)의 조천(遷) 문제로 또다시 함경도 북청에 1년여간 유배되었다. 진종은 영조의 큰아들로 일찍 죽어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조천이란 종묘에서 5대..

추사 김정희 2023.06.18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 세한도, 1844, 그 후의 이야기

당신 주변에는 이러한 사람이 있는가? 추사가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중국 학계와 교유를 이어가며 왕성한 독서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제자 우선 이상적(李尙迪1803~1865)의 역할이 매우 컸다. 당시 조선 중인 사회에서 가장 뛰어난 역관이자 시인이었던 이상적은 유배지에서 추사의 학문과 예술이 한층 더 나아갈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두 번이나 제주 유배지를 방문했으며 추사의 다양한 요구를 투정 한 번 하지 않고 들어주었다. 의 발문(跋文)에 의하면, 1843년에 중국에서 과 《대운산방집(大雲山房集)》 두 책을 구해 부쳐주었고, 1844년에는 하장령이 편찬한 총 120권 79 책에 달하는 방대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을 사서 보냈다. 심지어 이상적의 아우가 중국에 간다는 소식을..

추사 김정희 2023.06.08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 석란도 대련, 흥선대원군, 1891

흥선대원군이라고 하면 경복궁 복원과 쇄국정책을 먼저 생각하지만 석파 이하응(李應)이라고 하면 으레 그의 유명한 난초 그림을 떠올린다. 석파는 추사에게 난을 배웠고 추사는 그의 난초 그림을 높이 평가했다. 석파가 추사를 처음 찾아간 것은 1849년으로 석파 30세, 추사 64세였다. 이때 추사는 9년간의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막 풀려나 한강변 강상(江上)의 초막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석파가 난초를 배운 지 불과 2년도 안 되어 추사는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 가게 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1852년 여름, 추사가 유배에서 풀려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으로 돌아왔을 때 석파는 그동안 익힌 난초 그림을 추사에게 보내어 품평을 부탁했다. 이에 추사는 석파의 난초 그림을 극찬했다. 석파의 난에는 까슬까슬한..

추사 김정희 2023.06.04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 추사의 자화상, 조선 19세기

당신의 절정기는 언제쯤일까? 추사 김정희의 과천 시절은 북청 유배를 다녀온 후 1852년 10월부터 1856년 서거하기까지로, 추사 학예의 절정기에 해당한다. 천신만고 끝에 북청에 들어가 추사가 머물게 된 곳은 ‘북청 성동(城東)의 화피옥(樺皮屋)이라고 했다. 화피옥은 자작나무 껍질로 이어 붙여 지은 굴피집이다. 추사는 북청 유배에서 풀려나 별세할 때까지 4년간 말년을 과지초당(瓜地草堂)에 머물며 학문과 예술의 절정기를 보냈다. 과지초당은 그의 생부 유당 김노경이 한성판윤 시절 청계산 북쪽 옥녀봉 아래에 마련한 곳이다. 추사의 과천생활이란 평범의 연속이었다. 가족과 함께 생활하고, 독서하고,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치고, 글씨를 쓰고, 벗들을 찾아가고, 벗의 방문을 받고, 그 이상이 없는 매우 담담하고 조..

추사 김정희 2023.06.01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 세한도, 1844

살다가 살다가 사는 것이 너무 너무 힘들고 눈물도 말라서 흐르지 않을 그 때, #맹자 #고자장구 #告子章句 #하편 천장강대임어사인야(天將降大任於斯人也) 필선노기심지(必先勞其心志) 고기근골(苦其筋骨) 아기체부(餓其體膚) 궁핍기신행(窮乏其身行) 불란기소위(拂亂其所爲) 시고(是故)동심인성(動心忍性) 증익기소불능(增益其所不能)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사람에게 내리려 하면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뼈마디가 꺾어지는 고난을 당하게 하며 그 몸과 살을 굶주리게 하고, 그 생활을 빈궁에 빠뜨려,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한다 이는 그의 마음을 두들겨서 참을성을 길러 주어,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니라. #동그란길로가다 #박노해 누구도 산정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누구도 골짜기에 오..

추사 김정희 2023.04.25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 세한도, 논어, 장무상망, 1844

‘세한도’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는 스승 김정희에게 두 번씩이나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들을 구해서 보내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며 추사 김정희가 답례로 그려 준 그림이다. 지난해 ‘만학집’과 ‘대운산방문고’ 두 책을 부쳐 주고 올해 또 ‘황조경세문편’을 보내줬다. 이 책들은 세사에 늘 있는 책이 아니고 천만 리 머나먼 곳에서 몇 해를 두고 구한 책들로 일시에 얻은 것이 아니다. 게다가 세상의 흐름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을 뿐이다. 이 책들을 구하기 위해 이렇듯 마음을 쓰고 힘을 썼으면서도 권세가 있거나 이익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보내지 않고 바다 멀리 초췌하고 깡마른 유배객에게 보내줬다. 공자께서는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추사 김정희 2023.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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