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리더는 지나간 시절의 후광이 걷히고, 연극이 끝난후에서라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에스파냐는 15세기 말 신데렐라처럼 갑작스럽고도 화려하게 유럽 무대에 제국으로 등장했다. 1492년 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의 이슬람교를 축출하면서 700년 동안의 레콩키스타를 완성했다.
우여곡절끝에 신성로마제국과 에스파냐 모두의 왕권을 승계받았는데 그가 바로 카를로스1세이다. 그의 통치 범위는 오늘날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헝가리, 체코, 프랑스 일부, 스페인, 네덜란드, 벨기에, 나폴리, 시칠리아, 북유럽, 중남미를 아우르는 ‘해가 지지 않는 국가’였다.
당신은 에스파냐의 무적함대 아르마다(Armada Invencible)와 레판토해전을 알고 있는가?
스페인의 전성기는 1500년생 카를로스 1세와 그의 아들 펠리페 2세가 통치하던 16세기의 시기였다.
플랑드르지방에서 태어난 카를로스는 이사벨의 손자였으며, 실질적으로 통일 스페인의 첫 번째 군주가 되었다. 나폴리, 밀라노 및 시칠리아, 사르데냐 등 서지중해 섬들도 그의 것이었고, 콜럼버스의 항해로 발견한 남아메리카는 탐험가들이 한창 탐사 중에 있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합스부르크 왕가도 물려받았다.
동유럽 드넓은 영지는 물론 네덜란드 지역과 프랑스 일부, 토스카나 또한 그의 영토가 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지위 또한 그의 것이 되었다. 유럽의 절반이 그의 지배 아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늘은 그에게 거대한 제국과 강력한 권력을 주었지만 이를 온전히 누리고 즐길 여유까지 주진 않았다. 그의 나라는 늘 존립마저 위협받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두려운 적은 오스만튀르크였다. 오스만의 강력한 군세 앞에 헝가리 전선과 유럽을 지켜내는 일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에게는 군사적으로 뛰어난 동생 페르디난트가 있었다. 그가 전력을 다해 막아내면서 동쪽은 어느 정도 대비가 되었다.
하지만 그를 가장 크게 좌절시킨 일은 자신의 영토 내에서 들불처럼 번져가는 종교개혁 운동이었다. 종교재판소는 이사벨 여왕 시절 레콩키스타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교황이 특별히 허가해준 기관이었다. 본래 레콩키스타가 완수된 이후에는 폐지되어야 했으나 존속되다가 국왕이 국외에 머무는 특수한 상황을 틈타 큰 권한을 갖게 되었고, 종교개혁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을 이용해 스페인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으로 변해버렸다.
스페인은 가톨릭 입장에서 보면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말년에 스페인으로 가서 지냈다. 화가 티치아노와 함께 했다.
그는 죽기 전에 제국을 분할했다. 동유럽 합스부르크의 영토는 동생에게 넘기고 나머지 모두를 아들인 펠리페에게 물려주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지위 또한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었지만 이는 독일 제후들의 반대에 가로막혔다. 황제의 지위는 결국 동생의 것이 되었다.
그런데 이 결정이 스페인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로 편입되었던 스페인이 다시 분리되었고,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 지역과 프랑스 일부를 포함하는 알짜배기 영토를 새로 얻은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1556년 부친 카를로스1세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은 펠리페 2세 역시 놀라운 행운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작은 아버지와 영토를 나누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부담이 적고 실속이 큰 영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왕위에 오르면서 이미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의 왕이 된 그에게 힘의 원천이 되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남미 식민지에서 대규모 광산이 개발되면서 쏟아져 들어온 금과 은이 그 하나였고, 상공업이 발달한 네덜란드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세금 수입이 또 다른 하나였다. 이는 다른 나라 왕들 모두가 부러워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부친을 보고 자라면서 왕의 자리는 향락을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신에게 위임받은 권한으로 세상을 지켜야 하는 힘겨운 자리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좋은 덕목도 많이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성실했고 또 꼼꼼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제국 곳곳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읽고 검토했다. 늘 현안을 놓고 참모들과 숙의를 했고 보다 나은 지시를 내리기 위해 고심했다. 내성적이고 금욕적이었던 그는 공명정대하려 노력했고 작은 부패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신중왕(El Prudente)이라고 불렀다. 그는 가톨릭 세계 최후의 보루를 자처했다. 레판토에서 오스만 튀르크의 함대를 격파하고 유럽을 지켜냈으며, 종교개혁에 맞서 싸웠다. 가톨릭 세력에게 그는 마지막 희망과도 같았고, 이것이 그의 자부심이었다.
펠리페2세, 그의 삶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은 레판토 해전에서의 승리일 것이다.
어떠한가?
너무 넓은 영토 때문에 통치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카를로스 1세는 제국을 둘로 쪼개 신성로마제국은 동생 페르디난드에게, 에스파냐 왕국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넘겨주고 수도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1556년 에스파냐 왕위에 오른 펠리페 2세도 나라 안팎으로 만만치 않은 도전에 직면했고, 결국 오스만제국과 레판토해전(1571)을 치르게 된다.
그러나, 이 해전으로 유럽의 역사는 완전히 뒤바뀐다. 압도적인 힘으로 유럽을 압박하던 오스만튀르크는 패배하였고, 수세로 전환한 오스만튀르크는 서쪽 지중해를 장악한 뒤 유럽 전역을 정복하려던 꿈을 한동안 접게 되었다.
이로인하여 얻은 시간적 여유는 서구 유럽 입장에서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이후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과 더불어 각국이 중앙집권 경쟁에 돌입하면서 이들 서구국가의 힘이 오히려 동방을 압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셈이다.
이 승리로 가장 영광된 자리에 오른 이는 펠리페 2세였다.
교황을 비롯해 기독교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진정한 수호자로 불리게 된 것이다. 쏟아지는 찬사를 받으며 그는 그야말로 '온 세상을 가진 왕'이 되었다.
어떠한가?
고요한 바다가 아니었기에 훌륭한 항해사로서 최고의 실력을 발휘했던 펠리페2세,
그에게는 이제 신의 영광은 물론이요, 신의 세상을 지키는 보루로서 에스파냐의 영광을 드높이는 일 또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재위초부터 지었던 산 로렌소 성당과 수도원을 압도적인 위용으로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과거에 존재한 적이 없는 거대하고 장엄한 공간을 원했다. 이를 위해 이탈리아의 뛰어난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불러들였다.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지나고 있는 이탈리아에 비해 스페인의 회화는 시대조류에서 한참 뒤떨어져 있었다. 스페인 국왕인 그가 돈을 아끼지 않자 이탈리아 화가들이 몰려들었고 이들의 몸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랐다.
16세기 세상을 다가졌던 펠리페2세,
그로인하여 에스파냐는 절정기를 맞는다.
몇일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대한민국을 만장일치로 선진국 소속 그룹으로 격상하였다는 뉴스를 전하였다.
지금 한반도는 어디쯤에 와 있을까?
https://youtu.be/80od8TLZzDw
#티치아노, 펠리페2세,1556,프라도미술관
#아트인문학여행 #김태진
#스페인 #카를로스1세 #펠리페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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