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밭을 가는 농부는 글을 읽는 서생을 부러워하고, 글을 읽는 서생은 밭을 가는 농부를 부러워한다. 대나무 광주리 옆에 대롱대롱 매달린 표주박 속 탁주와 으리으리한 대궐 같은 저택에서 즐기는 산해진미도 실제로 먹고 마시는사람보다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이 더 진한 맛을 음미할 수 있다.
도연명陶淵明(365~427)의 시를 읽다 보면 농부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던 이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뜨거운 햇볕과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견디며 농사를 짓는 농부 본연의 삶은 도연명의 시처럼 절대 유유자적하지 않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누군가의 삶을 부러워한다. 아마 현재와 과거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당시엔 견딜 수 없을 만큼고통스럽게 여겨졌던 상황들도 시간이 지나고나면 어느새 달콤한 추억들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우리의 어린 시절 무미건조하고 단조롭게만 느껴졌던 풍경들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아마 이러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지나간 날들, 제삼자의 입장에서바라본 상황, 희귀한 경치 등은 모두 육지에서 아스라이 먼 바다 안개를 보듯 눈앞에 펼쳐진 경치를 자신의 모든 이해관계를 벗어던지고 느긋하게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가 형성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현실 속의 자신의 처지, 늘 보던 풍경을직시하면 마치 배를 타고 안개 자욱한 바다 위를 헤매는 것처럼 갑갑하고 어지럽다. 행여 제시간에 육지에 도착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풍경을 감상할 정신조차 없다.
실용적 태도로 사물을 보면 그것들은 모두 일상 생활의 도구이거나 장애물일 뿐이며 탐욕 또는 혐오를 일으키는 대상에 불과하다. 사물이 지닌 본연의 아름다움을 보고자 한다면 실용적 태도와 시각을 벗어던져야 한다. 즉 어떠한 목적도 지니지 않고 사물 본연의 이미지를 보고 즐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름다움은 현실의 삶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따라서 사물 본연의 아름다움을 보려면 현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볼 필요가 있다.
어떠한가?
나무는 바람을 막아주고 그늘을 만들어 쉴 곳을 준다. 또 집의 기둥이되거나 불을 지필 장작으로도 사용된다. 하지만 산책을 할 땐 특별히 나무의 실용성을 떠올릴 필요가 없다. 따라서 나무에게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다.
새로운 세계를 여행할 때 가장 쉽게 사물 본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익숙해진 환경은 이미 실용적인 도구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면 당장 사물의 실용적 가치를
어떠한가?
집에 돌아왔을 때 곡소리가 들리고 어린 자식이 굶어죽은 것을 안 순간, 두보가 그 자리에서 바로 <봉선영회>를 지을 수 있었을까?
두보는 아픔을 참고 되새기는 과정을 무수히 반복했을 것이다. 예술가가 자신의 감정을 글로 옮길 때는 그때의 감정을 극복하고 사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객관화 과정은 참담했던 현실에서 빠져나와 본인 스스로 자신의 글을 예술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지 못한다. 주체할 수 없이 북받치는 감정, 손에 꼽을 수조차 없을 만큼 다양한 경험을 한들 무슨 소용인가? 그것만으로는 결코 예술을 창조할 수 없다.
어떠한가?
오늘 지금 서있는 그 곳이 낯설고 불편함으로인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가?
북받치는 감정의 요동을 주체할 수가 없는가?
감정이 메마른 사람은 모든 사물에 흥미가 없다. 그저 평생 배부른 돼지가 되려 할 뿐 흥미를 추구하지 않는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은 삶이 아름답고 풍요롭다.
삶이 예술이 된다는 것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는 자세로 인함이며, 낯설음과 흥미로움은 수많은 사물을 느끼고 감상할 수있는 크나큰 배경이 되는 바이다.
아름다움은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을 때만 볼 수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
하프타임.
아름다움에 눈뜰 때다.
#카스파다비드프리드리히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1818·캔버스에 유채·94.5×74.8㎝), 함부르크 미술관
#아름다움이란무엇인가
#주광첸 #이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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