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

화가의 방, 빈센트 반고흐,1888

풍선(balloon) 2025. 8. 18.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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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3월 1일,
반 고흐는 예고 없이 파리로 찾아든다.

10년 전에 파리를 방문했던 반 고흐이지만,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망의 재개발 정책으로 변해버린 도시는 너무 낯선 곳이었다. 파리는 과거처럼 중세의 흔적을 곳곳에 간직한 도시가 아니라, 요즘으로 치면 아파트와 쇼핑몰이 즐비한 번잡한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반 고흐는 번화한 파리의 모습에 실망했다. 또한 자신을 파리로 이끈 인상파 화가들도 그를 위무해주지 못했다. 자기들 코가 석자였던 인상파 화가들에게 반 고흐 같은 신참은 관심 밖이었다.

세잔은 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고 “미치광이가 그린 그림”이라고 악평을 늘어놓았다. 이런 인상파 주역들의 비판에 충격을 받은 반 고흐는 화풍을 바꾸기 시작했다.

검고 칙칙한 색채 대신 환하고 밝은 파리풍의 색감을 담아내려고 했다. 그림의 대상도 바뀌었다. 주로 가난한 이들을 그렸던 그의 화제가 이제 파리의 풍경으로 바뀌었다. 물론 여전히 그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낭만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있었고, 모네와 피사로의 영향으로 도시화에서 밀려난 농촌 풍경을 주로 그렸지만, 그래도 그의 화풍은 급격하게 인상주의의 세련성을 차용하려고 했다.

반 고흐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을 때, 파리는 시냐크나 쇠라로 대표되는 점묘파들의 도시였다. 이런 까닭에 그의 그림에서 점묘파의 영향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파리에서 그의 작품 활동은 순탄하지 않았다. 파리에서 성공하고자 고군분투했던 화상이자 동생이었던 테오와도 끊임없이 갈등했다. 믿고 의지하고자 했던 인상파 화가들도 뿔뿔이 흩어졌기에 함께 뜻을 나눌 동지를 만나기도 힘들었다. 압생트에 취하고 성병에 걸린 반 고흐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그러나 그는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1886년 11월에 반 고흐는 친구의 도움으로 <거리의 화가들>이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반 고흐는 이 전시회를 허름한 식당에서 해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고 끝내 관철시켰다. 전시회는 전혀 호응을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피사로나 쇠라가 찾아와서 격려를 남겼다. 가장 의미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반 고흐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고갱이 전시회를 방문했다는 사실이다.

고갱은 '촌뜨기' 반 고흐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은 '모던보이'였다. 당시 반 고흐는 서른네 살이고 고갱은 서른아홉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어수룩한 반 고흐에 비해 고갱은 이재에 밝은 '도시 남자'였다. 출신 배경과 성격이 서로 달랐지만, 둘의 그림은 비슷한 세계를 추구하고 있었다. 반강렬한 색채가 뒤엉키는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이 둘의 그림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고흐는 어눌한 말투에 프랑스어마저 서툴렀던 자신에 비해 화려한 언술과 거침없는 말투를 구사하는 고갱에게 호감을 느꼈다. 시원시원한 고갱의 태도에 완전히 매료됐던 것이다. 고갱이 들려주는 다채로운 여행과 여성에 대한 무용담을 들으면서 반 고흐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자기 자신도 고갱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반 고흐는 고갱에 비해초라했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후회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고갱에게 얼마나 빠졌던지, 반 고흐는 화상인 자신의 동생 테오가 고갱쯤은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쳐댔다. 반신반의하면서도 고갱은 이런 반고흐의 생각에 동조했다.

비극이 예견된 반 고흐와 고갱의 동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어떠한가?

반 고흐는 어떻게든 고갱과 함께 있고 싶어했다. 고갱이 동료와 다투고 파리를 떠나자 반 고흐도 아를로 거처를 옮겼다.

아를은 반 고흐에게 약인 동시에 독이었다. 파리 생활이 반 고흐에게 남긴 것은 피폐해진 건강 상태뿐이었다. 그에게는 무엇보다 요양이 필요했다. 그래서 반 고흐는 풍광 좋은 아를을 선택했던 것이다. 아를에 도착한 그는 고갱에게 편지를 보내서 테오가 보내주는 돈으로 당분간 둘이 함께 먹고살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을 전했다.

물론 안타깝게도 이런 반 고흐의 호의는 후일 엄청난 재앙으로 바뀌어 그에게 돌아오고 만다. 그러나 처음 아를에 도착해서 방을 구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무렵, 반 고흐는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의 일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고갱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고갱이 원했던 것은 반 고흐의 호의보다 테오의 관심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고갱에게 필요했던 것은 사사건건 자신의 그림에 간섭하는 동료 화가였다기보다 자신의 그림을 구매해줄 화상이었다. 순진한 반 고흐는 이런 고갱의 이해관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유명한 「고흐의 방」은 두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살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림에 보이는 왼쪽 문이 바로 고갱이 머물던 방이다. 오른쪽 문을 열면 계단이 있어서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이 방이 있던 곳은 '노란 집’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고흐의 일생에서 행복과 고통을 동시에 준 집이기도 하다. 아를로 올 고갱을 위해서 반 고흐는 이 방에 걸 해바라기 그림을 잔뜩 그렸다. 마치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공주처럼 반 고흐는 고갱을 기다렸다.

어떠한가?
당신은 좋아하는 사람과 공간을 나누어써 본 경험이 있는가?

비록, 그 공간이 좁고 허름할지라도 그 마음에 진심이 담긴다면 그 곳은 유토피아임에 분명하다.

150여년전 고흐 또한 그러한 마음을 담아서 고갱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아닐까?

오늘문득,
푸른시절 방을 나누어 쓰던 친구가 생각난다.

비록 지금은 그 친구와의 연락이 끊어진지 오래지만, 잠시라도 그 때의 기억을 생각해 보면 즐거운 마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돌아갈 수 없는 시간임을 알기에,

오늘 또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러한 마음을 넉넉히 베풀어
정성껏 살아볼 일이다.

C'est la vie.

#화가의방, 빈센트 반고흐, 캔버스에 유화,
72 x 90 cm, 1888, 반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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