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귀엽고 소중한 남덕 군
당신의 편지 무척 기다리고 있던 중 3월 3일자 편지 겨우 받았소. 당신의 불안한 처지 매일 밤 나쁜 꿈에 시달리며 식은땀에 흠뻑 젖은 당신을 생각하고 대향은 남덕 군에게 그리고 어머님에게 정말 미안하고 면목이 없소.
3월 4일에 낸 내 편지에 부탁한・・・・・・ (새로운 서류 각각 한통씩) 그걸 받으면 당신에게 전화하고 열흘 이내에 부산을 떠나겠소. 더 빠를지도 모르겠소. 얼마 안 있어 만나게 되오 마씨의 돈은 내가 직접 받아서 갈 테니 걱정 마시오 이제부터는 당신과 아이들을 위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길이 여러 가지 있으니까 염려하지 말고 나쁜 꿈과 식은땀에 시달리지 않도록 충분한 섭생攝生을 하시오.
지금까지 나는 온갖 고생을 해왔소. 우동과 간장으로 하루에 한 끼 먹는 날과 요행 두 끼 먹는 날도 있는, 그런 생활이었소. 열흘 전쯤부터는 심한 기침으로 목이 쉬고 몸도 상당히 피곤한 상태요. 지난 겨울에는 하루도 옷을 벗고 잘 수가 없었고 최상복 형이 갖다 준 개털 외투를 입은 채 매일 밤 새우잠이었소. 불을 땔 수 없는 사방 아홉 자의 냉방은 혼자 자는 사람에겐 더 차가워질 뿐 조금도 따뜻한 밤은 없었소. 게다가 산꼭대기에 지은 하꼬방이기 때문에 거센 바람은 말할 나위가 없소.
춥고 배고픈, 그런 괴로운 때는 사경을 넘어 분명히 아직도 대향은 살아 남아 있으니까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만난다는 희망과, 생생하고 새로운 생명을 내포한 '믿을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을 지시하고, 행동하는 회화를 그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참고 견뎌왔던 것이오. 지금부터는 진지하게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의 생활 안정과 대향의 예술 완성을 위해서 오직 최선을 다할 작정이니 나의 귀엽고 참된, 내 마음의 주인 남덕군, 대향을 굳게 믿고 마음 편하게 밝고 힘찬 장차의 일만을 생각하면서 매일 매일을 행복하게 지내 주시오
이 편지를 받는 대로 부탁한 서류 새로이 한통씩 속히 작성하여 보내 주시오 신속하고 확실한 방법이 있으므로 거기에 한통씩이 필요하오. 어머님의 증명, 히로카와 씨의 증명, 모던아트협회의 서류, 이마이즈미 씨의 증명, 지급 항공편 등기로 부탁하오. 그것을 보내고 나서는 나에게서 오는 전화만 기다리고 있으면 되오. 고베와 시모노세키가 될 것같소.
나의 소중하고 귀중한 귀여운 사람이여!
참 화공인 중섭 대향 구촌을 마음으로 열심히 기다리고 있어 주시오 나의 소중한 보배, 발가락 군을 소중하게 아껴 주시오
※ 서류 각각 한통씩 '대지급' 으로 부탁하오. 마씨의 건은 안심하고 기다려 주오. 그럼 몸 성히 잘 있어요. 3일에 한통씩 꼭 편지를 보내 주시오
중섭 대향 구촌
* 이남덕은 이중섭의 제작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통운회사 사무장으로 일하던 오산고등보통학교 후배 마씨를 통해 일본 서적을 한국에 보내는 일을 했다. 일본 서적을 외상으로 구입해 한국에 보내고 이를 팔아서 생긴 이익의 일부를 이중섭에게 주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마씨가 약속을 어기고 횡령을 하는 바람에 27만 엔의 빚을 지게 되었다. 후에 8만 엔은 받았지만 나머지는 끝내 받지 못했다. 당시 27만 엔이면 2, 3인 가족의 일 년 생활비에 해당하는 큰 액수였다. 이남덕은 이 돈을 갚기 위해 바느질, 뜨개질 등을 닥치는 대로 하다가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
어떠한가?
현해탄 너머의 가족들을 생각하며
그대에게 가는 길을 모색하며
그리움을 담은 편지글.
전설의 화가 이중섭의 삶은
극도의 아픔과 고독과 배고픔이었음을,
그가 그린 제주 서귀포의 환상은
그의 삶과는 너무나 다른 상상속의 모습이겠지만,
한편으로는 가족과 함께한 시간이었으니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으리.
어떠한가?
당신은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당신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중섭, 서귀포의 환상, 나무판에 유채, 56x92cm,1951, 삼성미술관 리움

#이중섭 #서귀포의환상
#그대에게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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