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이중섭의 '흰 소'를 본 적이 있는가?
우직하고 성실한 소,
흰 소는 백의민족이었던 한국을 의미하고, 말라 피골이 상접해 있는 모습은 당시 6.25 전쟁 이후로 먹고 살기 힘들었던 대한민국의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흰 소는 화가 이중섭의 자화상이자 한국인의 삶과 기상을 상징한다.
태산 같은 힘, 멈춰 있지만 움직이는 것 같고 입과 코가 벌름거리면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 캔버스를 박차고 당장 뛰쳐나올 것처럼 역동적이고 박진감이 넘친다. 흰색으로 표현한 굵은 골격과 근육에서 강렬함이 전해지지만 악의가 없는 온순함과 우직함이 배어난다.
화가 이중섭은 평양의 유력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 이진태는 상업회의소 회장을 지냈다.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이중섭은 일본 도쿄의 제국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낮은 출석률과 부진한 성적, 불성실한 학교생활로 정학을 당했다.
자유주의 기풍의 문화학원으로 자리를 옮긴 이중섭은 유영국, 문학수 등 동문들과 함께 그곳에서 초현실주의와 추상 미술을 추구하는 전위 미술의 영향을 받았다.
문화학원에서 이중섭은 '아고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유달리 턱이 길어 성 앞에 턱을 뜻하는 일본어 '아고'가 붙은 것이다. 이중섭은 턱이 길었지만 미남이었으며 키는 173 센티미터 정도였고 체격은 날씬했다.
권투, 수영, 철봉 등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거기에 노래도 잘 부르는 팔방미인이었다. 그러니 유학생 이중섭에게 후배 야마모토 마사코(한국 이름 이남덕)가 관심을 보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국적을 뛰어넘은 두 사람의 사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결실을 맺었다. 두 사람은 해방 직전인 1945년 5월, 원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행복한 가정을 이룬 지 얼마 되지 않아 발발한 6·25전쟁은 이중섭의 인생 행로를 크게 바꿔놓았다.
그는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해군 함정을 타고 월남했다. 그와 가족은 그해 겨울 한 달여를 부산에서 보낸 뒤 이듬해 따듯한 제주로 갔다. 당시 피란민 서귀포 민가에 한 평도 안되는 쪽방을 배정받고, 배급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렇지만 온가족이 함께였기에 서귀포에서의 1년은 행복했다.
일년후 부산으로, 그후 얼마뒤 일본의 장인이 사망하면서 가족들은 일본으로 갔고, 혼자 한국에 남게 되었다.
어떠한가?
화가 이중섭은 평양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소를 그렸다. 이는 오산고보의 미술 교사였던 프랑스 유학파 임용련의 영향이었다. 그의 문하생들은 선생을 따라 일제강점기 한민족의 상징으로 소와 말 등의 동물을 즐겨 그렸다.
이중섭도 한국의 향토색을 띤 대표 소재로 소를 택했다. 이중섭은 소에 미친 사람처럼 틈나는 대로 들에 나가 소의 동작을 살피고, 그것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데 몰두했다. 그래서 그의 스케치북에는 항상 황소와 암소의 온몸, 또는 대가리나 뒷말, 꼬리 부분 따위가 가득 그려져 있었다.
소는 이중섭이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그려 온 테마였고, 통영 시절에 그린 소는 목가적인 풍경 속의 소가 아니라 작가의 내면을 표출하는 분신이었다.
내면의 소를 그릴 당시 이중섭이 현해탄 건너 가족에게 보낸, 사무치는 그리움이 담긴 편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지금 우리 네 가족의 장래를 위해서 목돈을 마련하기 위한 제작에 여념이 없소.”
"이제부터 가난쯤은 두려워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생의 한복판을 매진해갑시다."
어떠한가?
이 그림에는 화가인 기러기 아빠가 느꼈을 외로움과 그림을 팔아 가족을 다시 만날 것이라는 희망, 자신이 '새로운 표현의 제일'이라는 화가의 자부심이 뜨겁게 녹아 있다.
통영에서 제작한 그림들을 싸 들고 상경한 이중섭은 1955년 1월 미도파화랑에서 개인전을 연다.
개인전을 앞둔 이중섭은 그림들을 팔아 아내와두 아들 태현, 태성을 만나러 일본에 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는 가족에게 전시 준비 과정을 적어 편지로 보내기도 했다.
전시는 성공적이었다. 출품작 45점 가운데 20점가량이 판매됐다. 미국 문화원 외교관인 아서 맥타가트도 사 갔다. 이중섭은 박수근과 함께 그림이 팔리는 몇 안 되는 서양화가가 되었다.
어떠한가?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팔리기만 하고 수금이 되지 않았다. 팔리고 남은 그림으로 대구에서도 개인전을 열었지만, 수금 사정은 더 나빴다.
낙담과 절망에 빠진 이중섭은 폐인이 됐다. 결국 건강이 악화돼 1956년 9월, 한창 나이인 40세에 서울적십자병원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
어떠한가?
화가 이중섭의 흰 소는 거장의 인생사를 담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청춘과 사랑, 가족과의 행복, 기러기 아빠로서 겪은 그리움과 괴로움, 화가로서의 자아 모색과 자기 세계의 정착, 결핍이 낳은 실험 정신까지 이중섭은 그의 인생사를 통틀어 증명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당신은
이중섭의 '흰 소'를 본 적이 있는가?
이중섭 , 흰소 , 1954, 30.7x41.6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ㆍ홍라희기증
#이중섭 #흰소
#이건희홍라희컬렉션 #손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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