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려본 적이 있는가?
둥근 보름달이 떠 있는 푸르른 하늘. 무리를 향하여 내려오는 까마귀 한 마리, 맨 오른쪽 까마귀가 날아오며 무리를 향해 입을 벌려 무언가를 말하는 듯하다. 화면 중앙에 앉아 있는 녀석은, 몸은 무리 쪽으로 향하면서 고개는 날아오는 녀석 쪽으로 돌려 뭐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맨 왼쪽 녀석도 아래쪽을 보면서 마치 오라고 부르듯 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의 가장 사랑하는 소중한 남덕 군
그동안도 건강한가요? 덕분으로 일주일쯤 전에 무사히 서울에 닿았소. 6월 25일부터의 대한미술협회와 국방부 주최의 미전[경복궁 미술관에서 열림. <닭> <소> <달과 까마귀>를 출품해 큰 호응을 얻었다.]에 석 점을 출품했소. 모두 100호, 50호크기의 작품들인데, 아고리의 작품 세 점이 제법 좋은 평판인 것같소. 첫날에 아고리의 작품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 한 점은 이미 약속이 되었다오. 미국 사람(미국의 예일대학 교수)이 아고리 군의 작품을 칭찬하면서 자기가 모든 비용을 내어줄 테니 뉴욕으로 작품을 가지고 와 개인전을 하라고 권해줍디다. 2, 3일 후 찾아가서 약속할 생각이요. 이번에 낸 작품이 평판이 아주 좋았으니까 서울에서의 소품전도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친구들은 자기들 일처럼 기뻐하면서 하루빨리 소품전 제작을 시작하라고 권해줍디다. 일주일 후에는 친구가 방 한 칸을 빌려주기로 했소. 쌀값도 당해준다고 합니다.
다시 없는 나의 남덕 군, 태현이, 태성이를 위해서, 대제작(표현)을 위해서, 힘껏 버티겠소. 기어코 승리할 테니까 기대하고 그때까지 안정에 유의하고 하루빨리 기운을 내시오. 아고리 군의 평판이 좋다고 어머님께도 전해주구려. 또다시 굉장한 소식을 전하리다. 도쿄에 있는 대한민국 거류민단장 정찬진 씨의 동생 정원진 씨를 만나 사정을 말했더니 기꺼이 힘이 되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초청장을 정 씨에게 건넸소. 도쿄 주재 한국대사(외교부 대표)와도 친한 사이로 정식 패스포트를 만들어갖다 주겠다고 합디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어떻게 될는지 오래 끌면 불행해질 뿐이오. 작년처럼은 갈 수 없을게요. 그분이 일본 무역을 그만두었기 때문에 도리가 없소. 정원진 씨가 도쿄에 도착하는 즉시 어머님과 연락해서(당신은 나갈 수가 없으니까) 정 씨와 만나 서류 작성의 새 방법과 격식에 따라 협력해서 곧 작성해주기 바라오.
내일은 꼭 아고리의 사진을 두 장 보내겠소. 정 씨에게 전해주시오. 이 편지 받는 대로 곧 아래에 적은 전화번호로 전화를걸어 정찬진 씨의 동생 정원진 씨가 도쿄에 도착했을지를 물어봐주시오. 그리고 곧 답장을 주시오. 정원진 씨의 형 정찬진 씨도 내가 잘 알고 있는 분이오. 정찬진 씨에게도 사정을 이야기하구려. 통영에서 미술전을 한 화공 이중섭이라고 이야기하면알게요. 정원진 씨께 아고리가 초청장을 건넨 사정을 이야기하고 협력을 부탁하오. 방 한 칸 빌리면, 곧 정찬진 씨와 계 씨에게도 편지를 낼 생각이오. 매일 두 번쯤 전화로 정원진 씨가 도쿄에 도착했는가를 확인해주시오. 자기 자신의 볼일도 있을테니까 바빠서 당신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있을지도 모르니말이오.
그럼 몸 성히 잘 버티어주시오.
그럼 건강에 유의해주시오. 구상 형도 서울에 와 있소. 통영에서 출발하기 전에 미전 회장에서의 사진 받았는지요. 곧반가운 편지 기다리겠소. 남덕 군, 태현 군, 태성 군 발가락 군에게 뽀뽀 전해주시오.
중섭
어떠한가?
'인간 이중섭’을 조명한다면 제주도는 가족과 행복한 시절을 보낸 따뜻한 곳, 부산은 가족과 이별해야 했던 아픈 곳, 통영은 혼자 남아 작품에 전념했던 뜨거운 곳, 대구는 정신병이 발발한 슬픈 곳, 서울은 삶이 스러져간 쓸쓸한 곳이 된다.
휴정협정 직후인 1953년 늦여름에 그려진 것으로, 지루하던 휴전회담이 마감되고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할 희망에 부푼 이중섭의 마음을 반영한 듯 하다.
선선해지기 시작한 늦여름이라는 알맞은 계절과 보름달이 뜬 좋은 시간에 까마귀들이 모여드는 모습을 절묘하게 그려내었다.
어떠한가?
1938년 무렵 일본 문화학원(文化學園) 미술부에서 이중섭과 이남덕은 처음 만났다. 공용 세면대에서 붓을 씻으며 처음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1940년 연인으로 발전했다.
1944년 12월, 전운이 심각해지자 이남덕 여사는 “결혼이 급하다”는 이중섭의 전보를 받고, 홀로 대한해협을 건너 입국했다. 1945년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마지막 관부연락선을 탔다고 전해진다.
1951년 피란 통에 무일푼으로 내려간 제주도 서귀포 시절이 가족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마을 반장에게 얻은 4.6㎡ 남짓 단칸방에서 끼니를 위해 바닷게를 잡아 먹거나 배급 식량과 고구마로 연명하던 나날이었지만, 함께 모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이듬해 부친상 등의 이유로 이 여사는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 갔다. 이듬해 이중섭이 선원증을 겨우 구해 일주일간 도쿄에 머물기도 했지만,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어떠한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그 기다림 때문에 행복하다고 하지 않던가?
당신은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려본 적이 있는가?
#달과까마귀, 종이에 유채, 1953, 29*41cm, 개인 소장
#이중섭 #달과까마귀
#편지와그림들 #박재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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