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원피스를 입은 잔사마리, 르누아르, 1877

풍선(balloon) 2024. 4. 29.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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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봄날,
그 때는 언제인가요?

19세기말 프랑스의 파리는 아름다운 시대, 벨 에포크를 보냅니다.

지난 기억은 언제나 미화되기 마련이지만, 역사적으로 프랑스 파리가 가장 빛났던 시기였음은 틀림없습니다.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에 세상은 파리를 중심으로 돌아갔고, 세계의 사람들이 파리로 모여들면서 물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전에 없던 풍요를 누렸습니다. 변화의 중심이었던 파리는 매일처럼 들뜬 공기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르누아르의 그림은 벨 에포크의 풍요로움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미소 짓고 들떠 있으며 전반적으로 다스한 색채이죠. 대부분 프랑스의 봄날처럼 여유롭고 밝은 느낌입니다.

르누아르는 자신이 그린 젊은 여배우 장사마리와 가까이 살았고, 파리의 유명 인사였던 그녀를 열 번 넘게 그렸습니다. 르누아르는 그녀의 아름다운 겉모습뿐 아니라 내면까지 그림에 표현하기 위해서 그녀가 공연하는 코메디 프랑세즈 극장에 직접 찾아가 연극을 관람했다고 하죠.

지중해의 여신처럼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장사마리의 초상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단순히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아마도 전성기의 프랑스 파리, 벨 에포크에 가득했던 희망적인 분위기가 풍겨 나오는 것이겠죠.

아무리 풍요로운 벨 에포크라고 해도 분명 어두운 이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르누아르는 마치 꼭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따뜻한 그림만 고집했습니다. 르누아르는 마치 의도적으로 어두운 부분을 지우개로 깨끗이 지우고 일부러 따뜻함만 남겨놓은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어떤 무언가를 강하게 고집하는 것은 오히려 그것에 대한 결핍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면 르누아르의 '편향'도 무언가의 결핍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릅니다.

르누아르의 결핍은 무엇이었을까요?

모던의 풍요를 상징하던 벨 에포크에도 갈등은 존재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되면 그만큼 새로운 가치관들이 등장해서 서로 갈등을 일으키죠. 공산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같은 이념들은 이때 처음 등장했으며, 한 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이념의 갈등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자유로운 시대일수록 이념도 많아지고, 그에 따른 갈등의 총량도 증가합니다. 이 갈등은 개인 단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점점 국가 단위로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국가 단위의 갈등이란 곧 전쟁을 의미하죠. 근대에는 실제로 많은 국가 간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 절정을 보여준 것이 바로 두번에 걸친 세계대전이었고, 결국 이 전쟁들을 통해 근대는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근대 초기에 있었던 전쟁 중 하나가 바로 프랑스-프로이센전쟁이었습니다. 프랑스인들이 점점 세력을 확장하는 독일을 억누르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죠.

아직 젊은이였던 르누아르도 이 전쟁에 참전했습니다. 르누아르는 이질에 감염되어 이듬해 전역했지만 같은 인상주의 화가였던 장 프레데릭 바지유는 징집되었다가 전사했습니다.

바지유의 죽음은 르누아르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죠. 바지유는 모네, 르누아르, 시슬레와 함께 매일같이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초기 인상주의 4인방 중 한 명이었으니까요. 르누아르는 함께 꿈을 키워오던 가장 가까운 동료의 죽음을 겪어야 했습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파리는 여전히 혼란스러웠습니다. 프랑스 시민들은 전쟁에서 독일에게 패배한 책임을 물어 정권을 무너뜨렸고, 그 자리에 파리코뮌Paris Commune, 즉 인류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가 세워졌습니다.

이 역시 혼란의 연속이었는데 공산당 정부를 인정하지 않은 정부군이 다시 쳐들어오면서 정부군과 파리코뮌의 시민군 사이에 내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약 3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희생되었죠. 당시 파리의 시민이 170만 명 정도였으니 2%에 달하는 희생을 남긴 끔찍한 사태였습니다.

르누아르도 파리 내전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어느 날 센강 주변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던 르누아르를 파리코뮌의 시민군이 유심히 관찰하다 별안간 체포했다고 합니다. 르누아르가 강 주변을 스케치하는 것을 보고 정부군의 방어를 돕기 위해 지형 도면을 그리는 것으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르누아르는 열심히 항변했지만 과거 프랑스 정부군에 입대한 전력이 있었던 데다 애초에 공산주의자들은 예술가들을 부르주아의 하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포박된 채 인근 총살 부대로 끌려간 르누아르는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르누아르는 다행히 어떤 우연에 의해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몇년 전 정부군에 쫓기던 파울리고라는 파리코뮌의 당원을 구해준 적이 있었는데 마침 그 부대에 그가 근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르누아르는 파울리고가 옹호해준 덕분에 겨우 살아 나올 수 있었습니다.

파울리고는 인상주의의 거장 한 명을 구해주는 것으로 인류 미술사에 큰 공헌을 한 셈입니다. 하지만 정작 파울리고는 파리코뮌이 끝나자마자 정부군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벨 에포크는 이렇게 잔인한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파리코뮌은 짧은 집권 기간에도 많은 부르주아 문화를 파괴했습니다.파리 시청을 포함해 여러 유서 깊은 건물들이 파괴되었고 심지어 루브르박물관도 파괴될 뻔했죠.

어떠한가요?

파리코뮌의 비극과 르누아르의 대표작 <물랭드라 갈레트의 무도회>사이에는 5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과연 5년이 지나 르누아르가 이 그림을 그릴 때쯤 파리 시내는 완전히 복구되었을까요?

그림처럼 정말 파리의 시민들은 길거리에 뛰쳐나와 춤을 추며 즐거워할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있었을까요?

전쟁통에 말 그대로 죽다 살아난 르누아르는 정말 마음 가득 행복을 품고 파리 시민의 춤추는 모습을 그렸을까요?

어쩌면 정반대일지도 모릅니다.

르누아르는 파리코뮌 이후 폐허가 된 파리를 허망하게 지켜보는 시민들에게 그림으로라도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벨 에포크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우리가 힘을 합치면 그림처럼 최고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떠한가요?

르누아르는 이후에도 변함없이 밝은 그림만 그렸습니다. 누군가 르누아르에게 왜 이렇게 밝은 그림만 고집하느냐고 묻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림은 뭔가 기쁘고, 행복하게 해주고, 아름다운 것, 그래, 아름다운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화가들이 굳이 불행한 것을 창조할 필요가 없는 것이, 우리네 삶에는 이미 불행한 것들이 충분하니 말이야."

젊은 시절 같은 꿈을 꾸었던 친구의 죽음, 전쟁터에서 목격한 잔인한 죽음과 비인간성, 그리고 전쟁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 내전과 혼란,

아마도 르누아르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치하다고 표현해도 될 만큼 파리의 따뜻하고 밝은 모습에 집착했는지도 모릅니다.

르누아르는 타고난 본성이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포도 농장의 딸이었던 알린 샤리고와 결혼하여 평생 바람피우지 않고 아들 셋을 낳았고, 그 시대의 예술가치고 조금 심심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죠.

알린 샤리고도 점점 심해지는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던 남편을 열심히 보필하고 아들 셋을 탈 없이 키워 남편의 사랑에 보답했습니다. 이토록천성이 따뜻했던 르누아르였으니 벨 에포크의 잔인함을 따뜻한 그림으로라도 덮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어떠한가요?

마티스는 류머티즘으로 손을 덜덜 떨며 붓을 쥐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르누아르를 보고, 손이 많이 아프실 텐데 그림을 잠시 쉬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르누아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히 남는다네."

그렇게 보면 르누아르의 밝은 그림이 오히려 처절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술가로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불행한 시대의 모습을 자신의 그림으로 덮는 것뿐이었으니까요.

그의 말대로 고통은지나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르누아르의 그림에서 그저 근대 유럽 사회의 풍요로움, 즉 벨 에포크의 아름다움만을 떠올리니까요.

어떠한가요?

지금 당신의 삶이
풍요로움과 낭만, 웃음과는 거리가 매우 먼가요?

그렇다면
당신의 봄날,
그 때는 언제쯤일까요?

당신의 삶에
르누아르를 초대해본다면,

이미 당신 삶의  봄날,
그 가운데로 들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벨에포크를 응원합니다.

원피스를 입은 잔 사마리, 피에르 아우구스트 #르누아르, 1877, 오일 온 캔버스, 46×56cm, 러시아 모스크바 푸시킨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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