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절규, 뭉크, 1893

풍선(balloon) 2023. 10. 11.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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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절망이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리고 이 병에 걸리는 것은 인간뿐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절망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살아간다는 것은 절망 속에 살아가는 것이고, 잠시나마 절망을 망각하고 살아갈 수는 있지만 절망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키에르케고르는
사람이 절망이라는 병에 걸리게되면,

아무 생각없이 맹목적으로 살거나,
남들 사는대로 따라 살거나,
자신만의 고집에 매달려 살게끔 된다고ᆢ

그러므로 이러한 절망은 결국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죽음은 모든 것의 최후이기에, 생명이 있는 동안만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은 절대로 모든 것의 최후가 아니며, 죽음은 또한 모든 것을 포함한 영원한 생명의 내부에 존재하는 하나의 작은 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어떠한가?

그렇다면 죽음은 끝이 아닌가?

어린이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어른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 어린이는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어른은 그 무엇에 대해 두려워한다.

어린이가 불완전한 까닭은, 무서워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고, 그로인해 두려워 해야할 것이 아님에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자연 그대로의 인간도 어린이와 마찬가지로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모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무서운 것을 피해 있다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무서워해야 하지 않을 것을 무서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이란 보다 큰 위험을 두려워하고 있을 때 언제든지 보다 작은 위험 속으로 뛰어 들어갈 용기를 가지는 법이다. 하나의 위험을 무한히 두려워할 때는 그밖의 다르고 작은 위험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어떠한가?

코로나 펜데믹.

2020년전후 세계를 강타하고,
마스크와 거리두기의 뉴노멀 일상을 인류에게 선물하고 뒤안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남은자들의 뒤안길에 사람들은 희망이 아닌 절망을 느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각국의 이기주의에 글로벌협력은 점점더 어려워지고, 국지적이라고 생각했던 전쟁의 기운은 세계를 두려움과 공포라는 또다른 절망으로 내몰고 있다.

또한, 사람들을위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글로벌 양적완화의 후폭풍은 취약국가와 취약층의 사람들을 한겨울로 내몰고있다.

더군다나 민주주의로 포장된 포퓰리즘과 사익추구를 위한 정치로 인하여 사람들은  허탈함을 감추기 어렵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와 멀어지고있다.

다시 절망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절망은 가장 공포스러운 감정이지만 진정한 인간으로 변모할 수 있는 근접(近接)점에 와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이백여년전을 살다간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이 아니고서는 종교적 실존도 구원도 없으며, 인간은 여러 가지 절망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힘으로 돌아간다고 설파하지 않았던가?

살다가살다가 내 손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게되었을 때,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게 되었을 때,
겸손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게 되는 그 때,

절망의 그 때,
비록 그 마음이 죽음에 이르는 병일지라도,
살고싶다는 몸부림으로 멍든 마음의 그 때,

그 때가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그러한 때일지도 모른다.

고난이 유익이다.

#절규, 판지 위에 유화, 템페라, 파스텔, 크레용, 노르웨이 오슬로미술관, 1893년, 에드바르 #뭉크, 73.5 x 91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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