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티치아노베첼리오, 시시포스(Sisyphus), 1548

풍선(balloon) 2023. 5. 28.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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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당신의 삶은 안녕하신가?

1942년, 카뮈는 "세상에는 진실로 심각한 한 가지 철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살입니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를 판단하는 것이 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 이외 모든 것들, 세상이 3차원인지 아닌지, 혹은 마음이 9개 혹은 12개 범주가 있는지와 같은 질문은 나중에 등장합니다."

카뮈는 인생의 살만한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자살이라고 주장한다.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가, 혹은 없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 철학적 문제라고 그는 생각했고 만약 살아야 할 가치가 없다면 그 해답은 바로 자살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는 자살을 거부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향한 회피로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부조리한 삶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죽은 뒤에 신들을 기만한 죄로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벌을 받은 시시포스, 그 바위는 정상 근처에 다다르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져 영원히 되풀되는 형벌이었다.

혹시나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세상에 태어나,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뭔가에 열중하며 오랜 시간을 살아야 하는 인간의 삶, 매번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산꼭대기로 밀어올려야 하는 무의미한 일을 매일 반복한다는 것은 분명 가치없는 삶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조리임에 분명하다.

그림에서의 햇볕은 이곳이 시시포스가 돌을 굴리던 지하세계가 아니라 인간들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지상 세계임을 일러준다.

그러나 햇볕은 뒤에서만 화창할 뿐 그림 전면부는 여전히 어둡다. 인간들이 고단한 노역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세계를 어둡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른쪽에는 화창한 날씨 속에서 사냥을 즐기거나, 나무 그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인간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 대조적인 모습이 인간세계를 한층 더 어두운 곳으로 만든다.

즉 고단한 노역이 인간을 괴롭힐 뿐 아니라, 노역을 면제받은 타인이 취하는 휴식이 한층 더 그 세계를 어둡게 만든다.

돌 굴리는 사람들은 자문할지 모른다. 왜 이 고통의 공동체에서 저들만 예외가 될 수 있는가? 모두 휴식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면 차라리 모두 노역하는 세계를 다오. 이렇게 묻는 그들의 마음은 세계만큼이나 어둡다.

어떠한가?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는 시시포스가 무거운 돌을 밀어 올릴 때 짓는 어두운 표정과 불거진 근육에 집중했다. 그러나 얀 뤼켄은 돌이 다시 굴러 떨어지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것은 얀 뤼켄이 노역의 고단함뿐 아니라, 노역의 덧없음에도 주목했음을 보여준다.

돌이 그렇게 덧없이 굴러 떨어진 뒤 터덜터덜 다시 걸어 내려와야 하는 과정, 카뮈에 따르면, 인간은 자살하지 않고 그 끝나지 않는 고통을 향해서 다시 걸어내려 올 수 있다. 거기에 인간 실존의 위대함이 있다.

어떠한가?

21세기가 되었어도 시시포스 신화는 계속된다. 끝을 모르는 과학기술의 진보는 인간이 신에게 도전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수명은 계속 연장되고 있으며, 인공지능의 발달은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마침내 해방할지도 모른다.

이로인하여 늘어난 여가시간이 모두에게 고루 돌아가는 사회를 창출하고 실천할 수만 있다면. 꿈에도 그리던 유토피아가 펼쳐질지 모른다. 인간은 마침내 시시포스의 형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돌을 산정에 올려다 놓고 시야에 펼쳐지는 파노라마만 감상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어떠한가?
일이 없어진 인간?

한편으로는 '권태'라는
또다른 형벌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이제 시시포스는 자기가 알아서 바위를 산 아래로 굴리기 시작한다. 권태를 견디기 위해서 다시 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를 인용해본다.

만일 누군가를 완전히 파괴하고 짓밟아 버리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끔찍한 벌을 주고 싶다면, 극악한 살인자도 잔뜩 겁을 먹고는 몸을 벌벌 떨게 할 정도로 벌을 주고 싶다면, 완전히 전적으로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노동을 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시한번 묻는다.
오늘 당신의 삶은 안녕하신가?

당신의 오늘이 허무주의 동굴에서 벗어나 허무 이상의 의미를, 사막의 한가운데에서도 삶을 영위하고 창조하는 그러한 의미있는 날이기를 소망해 본다.

#티치아노베첼리오, '시시포스(Sisyphus)' 프라도미술관(스페인), 1548~1549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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