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사르다나팔루스의죽음, 외젠들라크루아, 1827

풍선(balloon) 2023. 4. 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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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그 무엇을, 어떻게, 왜 욕망하는가?

사르다나팔루스Sardanapalus는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입니다.그는 역대 어느 왕보다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지요. 중국으로 치면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유명한 은나라 주왕에 비할 수 있겠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치와 방탕의 끝은 몰락입니다.

사르다나팔루스에게도 그 순간이 옵니다. 반란군이 왕의 군대를 물리치고 함성과 함께 궁으로 돌진해오는 긴박한 순간, 사르다나팔루스는 도피 대신 죽음을 택합니다. 그러나 그가 택한 죽음은 대단히 선정적이면서도 어딘지 서늘한 데가 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모든 것들, 왕비와 궁녀들, 신하들, 노예들, 말들을 불러 모은 후, 자기 눈앞에서 그 모든 쾌락과 욕망이 스러져가는 것을 무표정하게 지켜봅니다.

이것은 외젠 들라크루아의 상상화입니다. 들라크루아는 사르다나팔루스를 통해 권력의 잔혹하면서도 매혹적인 파괴 욕망을 더없이 역동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불인 듯 피인 듯 화면 전체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붉은색은 감정을 더욱 고양시킵니다. 쾌락의 극단이라고 할까요, 허무한 욕망의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할까요. 자신이 사랑하던 것들을 죽임으로써 그것들을 완전하게 소유한 사르다나팔루스에게서 저는 지배 욕망의 극한을 봅니다.

어떠한가요?

누군가를 소유하려는 욕망은 그를 지배하려는 욕망과 같습니다.

"너를 갖고 싶어"라는 말은 “네가 내 명령에 복종하면 좋겠어"라는 말과 다르지 않죠. 물건을 소유하든 사람을 소유하든, 우리는 자신이 소유하는 것으로써 자기 존재를 인정 받기를 원합니다. 물건이 내 존재를 빛내준다면, 사람은 내 존재를 우월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물건과 달리 사람은 '소유'가 불가능합니다. 때문에 완전한 소유란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탐욕스러운 권력자들이 피지배자들을 죽음으로 내몸으로써 자신의 지배욕을 충족시키는 건 그 때문이지요. 타인에 대한 지배권을 타인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소유권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르다나팔루스 역시 그들을 죽임으로써 그들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속한다는 배타적 소유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어떠한가요?

우리의 욕망은 다양합니다.

삶에 대한 욕망, 보존의 욕망, 타인에 대한 욕망,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 등 욕망은 우리 자신을 추동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욕망'이라는 단어는 욕심과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주로 인간의 본능과 관계되는 것, '이성'으로 억눌러야 할 어떤 것으로 여겨집니다.

진정한 쾌락이란 가장 단순한 쾌락, '더 많은 것을 바라는 데서 오는 결핍감'이 없는 상태의 쾌락입니다.

쾌락이란 더 클수록 좋고, 따라서 더 큰 쾌락을 얻으려면 더 많이 욕망해야 하고, 때문에 아무리 욕망해도 늘 결핍감을 떨치지 못하는 우리 현대인에게는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핍은 '덜' 가진 데서 생기고 '더' 가지면 자연히 이 결핍이 메워진다고 생각하는 건 큰 오해입니다.

끊임없이 욕망할수록 행복은 멀어지지요. 설령 사르다나팔루스처럼 세상 모든 걸 가질 수 있다 해도, 그 역시 그것들을 영원히 누릴수 없다는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욕망과 그렇지 않은 욕망을구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꼭 필요한 것만을 추구하는 생활에 익숙해지기. 이것은 우리를 강하게 하고 삶을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으로 만듭니다.

어떠한가요?

우리들 인생에서 아이들은 성적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쾌락을 입증하고 싶어합니다. 미혼자들은 직장과 연봉을 비교하면서, 기혼자들은 시댁이나 처가의 재산, 배우자의 태도로 자신이 남보다 더 행복한지 덜 행복한지를 재려고 하죠. 더 나이가 들면 자식의 출세와 노후의 안정성을 가지고 현재의 만족도를 평가하고요.

하지만 누군가와 비교하면서 자신의 쾌락을 입증하려는 거야말로 부질없는 일입니다. 사르다나팔루스처럼 막대한 부와 힘을 소유한 최고의 권력자조차 허망하게 죽지 않나요?그가 폭군이 아닌 성군이었다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가속화된 욕망과 쾌락에 몸을 실을 게 아니라, 거기서 빠져나와 신중하게 자문해야 하지 않을까요?

죽기 직전, 사르다나팔루스는 깨달았을 겁니다. 내가 소유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결국 내 것일 수 없었구나. 나는 살아서 모든 것을 소유했지만 살아 있는 내내 불행했구나. 그래서 기어이 저들에게 죽음으로 앙갚음을 하고야 마는구나. 욕망과 쾌락이란 이토록 부질없는 것이로구나. 스러져가는 것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사르다나팔루스의 저 서늘한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환상이 멸하는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모든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다다르게 됩니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왜 욕망하는가?

사르다나팔루스의죽음. 외젠들라크루아(이탈리아), 1827년, 캔버스와 유채,
392× 496㎝.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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