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귀스타브카유보트, ‘비 오는 날, 파리의 거리’, 1877

풍선(balloon) 2023. 12. 20.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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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지금은 어떤 모습인가?

19세기 후반, ‘파리의 화양연화’ ‘벨 에포크Belle Epoque(아름다운 시절)’, 역사에서는 1890년부터 1910년대 초까지의 파리를 말한다. 이 기간 동안 프랑스는 근 100년 동안 경험해 보지 못한 평화를 누렸다.

18세기 프랑스는 왕정 시대의 몰락을 가져온 프랑스 혁명, 루이 16세의 처형, 왕당파와 혁명파의 격돌, 혁명파의 분열이 계속되면서 단 하루도 평화로운 날이 없었다.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프랑스는 왕정으로 다시 복귀했다.

나폴레옹이 벌인 전쟁은 지난했다. 1804년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1815년 빈 회의로 유럽의 새로운 질서를 개편할 때까지 무려 10여 년 동안 프랑스를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빈 체제 역시 평화는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1848년 혁명의 촛불이 다시 불타올랐고 이는 십수 년의 투쟁 끝에 국민 국가의 탄생을 가져왔다. 그 뒤 1890년대 들어서면서 프랑스는 전쟁과 내전 없는 평화 시기를 맞이했다.

경제적 부흥과 예술적 성취 또한 전성기를 맞이했다. 파리 세계박람회, 에펠탑 완공, 알렉상드르 3세 다리 건축, 첫 번째 지하철 개통, 물랭 루즈와 맥심 레스토랑의 번성 등등.

프랑스는 풍요를 누렸고, 모든 분야에서 국가는 안정기였고 사람들은 그저 눈앞의 아름다운 풍요를 즐기기만 해도 되는 시절이었다. 그야말로 프랑스의 ‘화양연화’인 셈이다.

이 시기, 벨 에포크는 제국주의와 상통한다. 유럽의 각 국가들은 세계로 향하며 그들의 식민지 건설에 열을 올린 시기다. 제국주의의 극성은 당연히 유럽 국가의 전성기를 가능케 했고 그 안에서 문화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높아졌다. 또한 르네상스 시대부터 유럽의 전통처럼 자리 잡은 귀족과 부유층의 문화에 대한 호사와 후원이 어쩌면 ‘예술의 벨 에포크’ 시대를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이 시기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1914년, 첫 총성이 울리며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화에 휩싸인 것이다. 그래도, 그 짧은 20년 동안 파리에서 예술과 문화는 세기적 발전을 이루었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가 누리는 예술적 호사도 그 덕분일 것이다.

어떠한가?

지금부터 정확히 백여년전, 역사는 1920년대를 ‘로스트 제너레이션Lost Generation’ 시대라 일겉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기존 체제와 변화하는 현실의 급격한 충돌, 전쟁 후유증, 자본주의의 극성스런 전파력 등에 미국의 젊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환멸을 느끼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무력해 보이는 그들은 미국을 떠나 예술의 감성이 아직도 살아 있는 파리로 대거 건너갔다. 그들이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대표적인 작가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등, 그들은 거트루드 스타인의 살롱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녀는 파리에 모인 젊은 예술가들의 ‘대모’ 같은 존재였다. 그녀의 살롱에서는 매일 예술과 창작의 열띤 토론이 벌어졌고 가난한 예술가들도 그곳에서 만큼은 ‘지적 풍요’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가장 협오했던 것은 물질주의에 물들고 효율적 관리를 위해 획일적인 질서를 강요하는 당시 미국의 사회 분위기였다. 이들은 이 시스템에 안착하기를, 또 체제와 관습의 일부가 되기를 거부했다. 물론 큰 전쟁 이후 퍼진 허무주의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나 헤밍웨이는 참전 군인으로서 전쟁의 참상, 인간성 말살, 전쟁이 빚어낸 폐해와 공포의 전이를 몸소 겪으며 인간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되었다.

어떠한가?

1900년부터 1920년대까지, 인류는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당시 발견하고 만들어진 모든 기계적, 전기적, 과학적 산물들은 지금의 인류가 사용하는 모든 문명들의 원형이 되었다.

이러한 과학적 문명의 급격한 발달은 전쟁에서 대규모 살상을 가능케 한다. 유럽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세계를 주도하는 힘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미국은 전쟁의 대가로 경제 번영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 번영의 기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경제 대공황의 암울한 그림자가 미국 사회를 뒤덮기 시작했다.

이 변화의 주기는 생각보다 짧았고 미국의 전체 사회 시스템이 급격한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당시 20대들은 이미 기득권은 선배들이 장악하고 있고 자신들은 곧바로 들이닥칠 후배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이것은 전쟁의 후유증보다 더 큰 것이었다. 그들이 본 미국은 물질주의의 범람, 정서적인 정체, 청도교적 관습이 계속되는 사회였다.

이러한 사회에서 정신적으로 소외 된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선택은 모든 문화와 예술이 모이는 용광로, 파리였다. 획일적인 질서도, 구체화되고 강요된 관습도 없는 자유로운 창작 활동이 가능한 세계 유일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어떠한가?

1920년대 로스트 제너레이션 세대들이 모여든 파리는 어쩌면 20세기 르네상스였을 것이다.

당신은 지금 어떠한 세대를 살고 있는가?
당신의 마음 속 ‘벨 에포크’는 언제인가?
당신은 어떤 곳에서 르네상스를 경험하는가?

어떠한가?

현재란 그런 것, 늘 조금은 불만스러운, 그러나 삶이 원래 그런 것 아니던가?

당신이 지금 파리에 있고,
그곳에서 갑작스런 비를 맞게된다면,
당신은 남아서 파리를 즐길 것인가?

파리는 비올 때 제일 예쁠 지도 모른다.

당신의 지금을 응원한다.

#귀스타브카유보트, ‘비 오는 날, 파리의 거리’, 1877, 캔버스에 유채, 212.2×276.2cm, 시카고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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