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월,
프랑스 파리의 한 작은 집.
"이봐요들. 잘 있어요?" 옆집 이웃이 문을 두드렸다. "며칠째 집 밖으로 안 나오고 있어서. 혹시 무슨 일 있으셔?" 그는 문고리에 손을 댔다. 살짝 힘을 줬다. 허무하리만큼 쉽게 열렸다. "모디, 잔. 나 잠깐 들어갈게?" 그가 현관으로 발을 디뎠다. 아니, 여기 왜 이래…. 찬 기운이 그대로 옷을 뚫고 들어왔다. 집 안이 얼음장이었다. 문을 닫아도 밖에 있는 느낌이었다. 반쯤 열린 정어리 통조림이 발에 걸리적거렸다. 쓰레기가 얼마나 많은지, 집이 아니라 창고 같았다.
"어디 있어? 안방에 있어요?" 그는 집 깊숙한 곳에서 인기척을 들었다. 잔뜩 쌓인 종이박스와 술병 따위를 치우며 나아갔다. 그리고 그가 본 광경은, 만삭이 된 아내 잔이 초주검 상태의 남편 모딜리아니를 꽉 끌어안고 있는 것이었다. 시장 바닥에 깔린 공업용 천까지, 아무튼 추위를 막을 만한 것은 싹 다 모아뒀다.
잔 에뷔테른,
병상에 누워있는 모딜리아니,
잔은 혼이 쏙 빠진 듯했다.
공포에 사로잡혀 넋이 나갔다.
잔의 품에 안긴 모딜리아니는 곧 죽을 것 같았다. 언뜻 봐도 중병이었다. "잔? 이봐, 잔. 정신 차려봐요." 예고 없이 찾아온 이 손님은 잔의 앙상한 몸을 마구 흔들었다. 잔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화들짝 놀랐다. "아저씨…. 남편이 아파요. 며칠째 일어나질 못해요." 잔은 취한 듯 중얼댔다.
"잔, 당신은 괜찮아요? 당신도 누구를 보살필 처지는 아닌 듯한데?" "이 사람이 죽으면 저도 따라 죽을래요. 아저씨. 이 사람이 가면 저도 따라간다고요." 잔은 대화가 되는 상태가 아니었다. 모딜리아니는 그런 잔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그는 당장 넘어갈 듯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옆집 이웃이 의사를 불렀다. 왕진 가방을 든 의사가 급하게 찾아왔다. "상태가 심각해요. 당장 입원해야 해요." 그가 청진기를 내려놨다. 표정에 그늘이 졌다. 의사가 침을 꼴깍 삼켰다.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참는 듯했다.
1917년 봄,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파리 몽파르나스의 카페에서 잔 에뷔테른을 봤다. 그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모딜리아니는 33세, 잔은 19세였다. 비극적 사랑의 종이 울렸다. 모딜리아니는 잔의 윤기 나는 갈색 머리에 빠졌다. 잔의 푸른 눈동자에 푹 젖었다. 눈처럼 새하얀 흰 피부를 찬양했고, 신비롭기까지 한 성숙함에 감동했다.
모딜리아니를 아는 이들은 잔에게 호감을 느꼈다는 그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그 잘생긴 파리의 귀공자께서는 이쪽 세계에서 유명한 스타였다.
뚜렷한 이목구비, 우수에 찬 분위기는 많은 이의 마음을 흔들었다. 모딜리아니도 자신의 강점을 즐겼다. 그는 화려한 외모, 통통 튀는 성격의 여성을 좋아했다. 수많은 여성과 염문을 뿌렸다. 심심하면 옆자리를 갈아치웠다. 술집을 전전하는 그는 불쏘시개 같은 사랑도 마다하지 않았다.
잔은 분명 예뻤지만 얌전하고 기품이 있었다. 조각가 자크 립시츠는 잔을 놓고 "고딕적인 외모를 가졌다"고 했다. 고딕 성당이 주는 고고함, 순결함을 갖췄다는 뜻이었다.
술과 약을 달고 산 귀공자님께서 그간 어울린 여성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모딜리아니 자신도 놀랐다. 잠깐 스쳐 가는 호기심이 아니었다. 열병의 포로가 된 모딜리아니는 잔에게 고백했다. 잔은 수줍게 웃었다. 사실 잔은 모딜리아니를 오래전부터 봐왔었다. 잔은 당시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Académie de la grande chaumiere)에서 그림을 배웠다. 그 근처에 모딜리아니의 낡은 작업실이 있었다. 잔은 고주망태가 된 이 남자가 작업실 문 앞에서 허우적대는 걸 여러 번 바라봤다. 이상하게 이 남자에게 자꾸 끌렸다.
괜히 처연하고 애틋했다. 생각하면 가슴이 뛰어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다. 모딜리아니의 고백을 받은 잔은 꿈을 꾸는 듯했다. 모딜리아니는 초조하게 잔의 답을 기다렸다. 잔은 그의 어깨에 몸을 살짝 기댔다. 모딜리아니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둘은 그렇게 사랑의 파도에 휩쓸렸다.
잔은 모딜리아니를 계산 없이 좋아했다. 순수하다 못해 순진하게 사랑했다. 그러나 잔의 가족은 모딜리아니를 인정하지 않았다. 잔의 부모는 로마 가톨릭의 중산층이었다. 이들의 눈에 모딜리아니는 재앙이었다.
이 남자가 가진 건 곱상한 외모 뿐이었다. 돈도, 명예도 없는 무명 화가였다. 술과 약에 찌든 난봉꾼이었다. 특히 걱정되는 건 그의 병약함이었다. 삐쩍 말라선 계속 기침을 했다. 걸음걸이마저 영 시원치 않았다. 곧 무슨 일을 치를 듯했다. 잔보다 14살이나 더 많은 점도 충격적이었다.
잔의 부모는 잔을 설득했다. 제발 이 남자는 아니라고 애원키도 했다. 줄곧 부모 말을 잘 따른 잔은 이번 만은 고집을 부렸다. 부모처럼 신앙심이 깊던 잔은 신을 믿듯 사랑도 믿었다. 잔은 모딜리아니와의 만남을 숙명이자 확신으로 이해했다.
그녀는 결국 짐을 쌌다. 집을 나왔다. 모딜리아니의 작업실로 갔다. 모딜리아니는 또 술에 취해 작업실 문 앞에 잠들어 있었다. 잔은 그를 부축했다. "잔? 당신이 왜 여기에?" 모딜리아니가 혀가 꼬부라진 채 중얼댔다. "내가 왔어요." 잔은 땀에 젖은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날부터 둘은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았다.
모딜리아니는 작업실에서 틈틈이 잔을 그렸다. 길쭉한 얼굴, 사슴처럼 가늘고 긴 목, 우수에 찬 표정은 기괴한 듯 기괴하지 않았다. 외려 차분하고 안정적이었다. 우아하면서도 서글퍼 보였다. "이런 그림을 계속 그릴 건가요?" 언젠가 잔이 물었다. 잔은 그의 그림이 좋았다. 그만이 그릴 수 있는 것이었다. 동화 속 소녀처럼 예쁘게만 그리려는 흔한 화가들과는 달랐다.
모딜리아니는 말없이 웃었다.
"그런데, 당신이 그리는 제 얼굴에는 왜 눈동자가 없어요?" 언젠가 잔은 이렇게도 물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 잔의 눈은 텅 빈 아몬드 같았다. 외려 깊어진 두 눈이 전해주는 감정은 묘하기도 했다.
"내가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면." 모딜리아니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때 눈동자를 그릴게." 그가 그녀의 동그란 푸른 눈을 바라봤다.
어떠한가?
모딜리아니는 잔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런 그가 술과 약에 찌들었을 때면 가끔 그녀를 후려치려고 했다. 잔의 머리채를 잡아끌어 뤽상부르 공원 문을 향해 던지기도 했다. 제발 나를 가만히 두라고 소리쳤다.
잔은 그런 모딜리아니를 꼭 안았다. 신과 같은 인내심을 갖고 그의 영혼을 보듬었다. 그러면 모딜리아니는 틀림없이 잔의 품에 안겨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어떠한가?
그럼에도불구하고 잔은 모딜리아니를 포기하지 않았다.
실패에 대한 불안, 죽음에 대한 공포, 모딜리아니의 빛을 못 보는 천재성과 함께 맹렬하게 드러나는 연약함도 사랑한 것이다.
추위는 냉혹했다. 난로를 피울 돈조차 떨어지자 좁은 작업실 안에 서리가 내렸다. 잔은 어쩔 수 없이 아이와 잠시 친정으로 피신했다.
잔의 부모는 딱 거기까지 허락했다. 모딜리아니는 갈 수 없었다. 그런 모딜리아니는 잔이 그리워지면 그 집 앞을 덜덜 떨며 서성였다. 한참을 쪼그리고 있다가 돌아갔다. 잔은 당장 뛰쳐나가 그를 안고 싶었다. 부모가 철통같이 막은 탓에 그럴 수 없었다.
어느 날 모딜리아니는 잔에게 검은색의 큰 모자를 줬다. "거기에 검은 옷을 입고 모델이 돼줄 수 있겠어?" 모딜리아니가 수줍게 요청했다. 검은색은 모든 것을 품어주는 색이다.
잔은 모딜리아니의 불안함과 무절제함, 충동과 울분을 한 번도 밀어낸 적이 없다. 잔은 늘 받아주고 안아줬다. 모딜리아니는 그런 잔에게 자신의 방식으로 감사를 표했다.
모딜리아니는 이쯤부터 잔의 눈동자도 표현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그려진 그림 속 자기 눈동자를 보는 잔의 눈동자는 때때로 눈물로 가득 찼다.
어떠한가?
"내가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면."
"그때 눈동자를 그릴게."
그가 그녀의 동그란 푸른 눈을 바라봤다.
그녀의 동그랗고 푸른 눈,
영혼이 맑은 순수함을 가진 백합을 닮았다.
백년후의 우리들에게 잔느를 닮은
순백의 꽃잎은 전한다.
"당신과 함께 있으니 꿈만 같아요"
당신은 지금
누구와 함께 있는가?
Amedeo Clemente #Modigliani, Jeanne Hebuterne, 1919, oil on canvas, 55 x 38 cm, Private Collection
#이원율 #후암동미술관 #모딜리아니
#세종문화회관 #도슨트 #정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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