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도
찬란한 변화의 순간이 있었던가?
어느 날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은 산책을 나가셨다. 그분은 모두가 알지만 좋아하지는 않는 사람, 곧 마태가 있는 곳을 지나가셨다.
히브리인인 마태는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는 일로 먹고 살았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을 줄 분명히 알면서도 그 일을 선택했다. 그의 동포 대부분은 세리들을 매국노로 취급했다. 세리들은 이스라엘을 약하게 만들어 로마를 더 강하게 만드는 한 편, 세금을 정해진 액수보다 더 거둬들여 자신의 주머니를 채운 자들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태는 이웃의 경멸에 익숙해졌다. 수북이 쌓이는 돈은 공동체에서 내처진 고통을 달래 주었지만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그런 삶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가버나움의 다른 주민과 마찬가지로 마태는 나사렛 예수께 매료되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세관을 지나가실 때 하던 일을 멈추고 구경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신 것이다.
"나를 따르라."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마태는 당장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으며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마태는 에수님의 얼굴을 살폈지만 그분에게서는 자신을 보는 사람들에게서 늘 느껴지던 경멸의 빛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오직 함께 가자는 진실한 초대뿐이었다. 마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과 나란히 가버나움 거리를 걸었다. "오늘밤 함께 식사를 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마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단어들을 곱씹었다. 식사? 오늘 밤? "예, 그렇게 하시죠." 마태는 그렇게 말하고서 즉시 잔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올 수 있는 사람들은 전부 초대했다. 대부분은 세리들이었다. 그 외에도 사회에서 지탄을 받는 자들이 찾아왔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편안한 모습으로 마태의 친구들과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제자들에게 물었다. "너희 선생은 왜 저런 자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그 질문을 들은 예수님은 경직되셨다.
"너희는 하나님이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신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종교적인 정확성이라고 생각하느냐? 너희가 스스로 규칙을 정하고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보다 너희를 더 좋게 여기신다고 생각하느냐?"
"의사가 필요한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병자다. 하지만 너희는 병든 사람들을 경멸한다. 하나님이 호세아를 통해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이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느냐? 나는 망가진 자들이 인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오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왔다. "
어떠한가?
마태는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에 관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의 논쟁을 들으면서 그때부터 예수님을 따르기로 조용히 결심 했다.
이전에는 그 누구도 자신의 존엄성을 이렇게 웅호해 주지 않았다. 예수님은 마태의 추악한 행실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마태가 하나님 대신 돈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아셨다.
그럼에도 마태의 집에서 예수님은 사회에서 무시받고 경멸당하는 이들과 친구가 되는 편을 선택하셨다.
마태는 무슨 대가가 따르더라도, 심지어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어떠한가?
당신은 <성 마태를 부르심>을 그린 400여년전의 카라바조를 기억하는가?
카라바조는 성경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생의 변화의 순간들에 끌렸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도마의 손가락을 그분의 옆구리에 뚫린 상처로 이끄신 순간,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기 위해 길을 떠난 사울이 땅에 엎드러져 갑자기 그리스도의 능력과 임재로 회심한 순간,
예수님이 그분을 죽이려는 자들에게 넘겨질 때 베드로가 그분을 부인한 순간들에 끌렸다.
어떠한가?
38세라는 짧은 생을 산 그는 소설의 주인공처럼 극적인 삶을 살았다. 타협을 거부했고, 성질이 불 같았던 그는 크고 작은 싸움에 말려들었고, 급기야는 사소한 말싸움으로 살인을 하게 됐으며, 이후 죽기 전까지 도피생활을 하는 운명에 처했다.
반면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감동했다. 죄인들에게 구원이 요원하다는 사실과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능력이라는 주제는 그의 모든 작품에 흐르고 있다.
그는 혼신을다하여 그의 그림으로 평생 그 이야기를 전하고 또 전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떠한가?
당신에게도
이천여년전 마태처럼
사백여년전 카라바조처럼
찬란한 변화의 순간이 있었던가?
다가올 당신의 삶에
찬란한 변화의 순간을 기대해본다.
#카라바조, '부르심을 받은 성 마태오',1600, 322 x 340 cm, 캔버스에 유채, 로마, 성 루이지 프란체시 성당.

#카라바조
#부르심을받은성마태오
#성과속사이에서외줄타기
#이중성의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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