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연휴를
뒤로하고 반겨나온 우수,
겨울의 눈과 얼음이 녹아 빗물이 되는 때.
추위로 숨죽였던 대지를 축이고,
다가올 풍요와 충만을 기대하라는 신호일까?
우리는 종종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지 않으려한다.
한 겨울이 지나면 보이지도 않던 꽃순에 망울이 피어나는 것을 경험하고서도 말이다.
푸른시절 상아탑을 뒤로하고
생경한 사회로의 문지방을 넘은지도
세번째 십년을 지나 네번째 십년의 전환점.
혹시 지금 당신은 보이지 않는 미래로인하여 걱정과 한숨뿐인가?
어떠한가?
27세의 프랑스 청년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çois Millet, 1814 ~ 1875),
〈이십 대 자화상〉은 밀레의 머리 스타일과 수염, 그리고 옷매무새까지 매우 잘 정돈돼 있다. 그러나 마치 한 장의 증명사진을 보는 것과 같다.
시대와 세상에 대한 열정이 그의 얼굴을 물들였기 때문일까?
이마에서 콧등을 따라 드러난 그의 피부는 순수한 백색에 가까운데반해 뺨은 열은 홍조를 띠며 대조를 이룬다. 적갈색 배경은 오히려 머리카락을 강조하며 깃을 세운 짙은 색 코트 사이로 밀레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은 단정하여 보인다. 턱수염 아래로 상반신은 선명하지 않게 간략히 묘사되었고, 자연히 시선은 얼굴에 집중되고 보는 이에게 말을 거는 듯한 눈빛에 주목하게 된다.
화가의 눈빛만큼은 슬픔을 가득 담고 있다. 밀레는 자화상에서 조금의 숨김도 없이 자신의 마음속 저 깊은 곳에 내재한 원초적 슬픔을 있는 그대로 표출했다. 그 슬픔의 이유는 무엇일까?
장 프랑수아 밀레는 빈곤한 프랑스 농민의 고단한 일상을 우수에 찬 분위기와 서사적 장엄함을 담아 그린 사실주의 화가이다.
1814년 10월 4일 프랑스 서북부에 위치한 노르망디의 그레빌아그(Gréville-Hague)에 있는 작은 마을 그뤼시(Gruchy)에서 태어났다. 부농 집안에서 태어난 밀레는 어린 시절 농사로 바쁜 어머니 대신 신앙심 깊은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으며, 가족 농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밀레의 아버지는 미술에 대한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19세 때 근교 셸부르에서 활동하던 초상화가이자 다비드의 제자였던 무셸에게 보내 그림을 배우게 했다. 그러나 2년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8남매 중 장남이었던 밀레는 책임감 때문에 그림 공부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그를 사랑했던 할머니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다시 그림을 그리도록 독려했고, 이듬해 국립미술학교 파리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다.
1839년, 로마대상에 낙선하고 에콜 데 보자르를 그만둔 후 그는 셸부르로 돌아와 약 2년간 초상화가 생활을 했다. 1841년, 폴린 비르지니 오노와 결혼한 후 파리로 올라온 그는 당대 서민들에게 인기 있던 풍속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했으나 끼니를 잇기도 어려웠다. 밀레는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열심히 초상화를 그렸지만 생활은 여전히 궁핍했다.
아내 오노의 결핵이 날로 심각해지자 밀레는 약값을 벌기 위해 누드화까지 그리기 시작했다. 시름시름 앓던 아내가 결혼한 지 3년만에 폐병으로 세상을 뜨자 실의에 빠진 화가(30세)는 한 동안 붓을 꺾는다.
이후 밀레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스스로 농사를 지어 본 경험 때문인지, 프랑스 농민들을 가장 프랑스적으로 그린 화가라고 평가된다. 또한 그는 흔히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화가로 불린다. 바르비종은 파리 근교 퐁텐블로 숲 근처의 작은 마을로, 1820년대 후반부터 많은 화가들이 시골 풍경을 그리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19세 초 정치적 혼란과 산업화로 인한 급격한 도시화에 지쳐 자연을 갈망하고 자연 속에서 안식을 찾고자 했는데, 이들을 일컬어 바르비종파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과는 달리 풍경보다는 오히려 농민생활을 더 많이 그렸다. 그런 가운데 어딘지 모르게 풍기는 종교적 정감이 감도는 서정성으로 친애감을 자아내고 오늘날까지 유럽 회화사상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살롱전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 할머니의 부고를 받고도 여비가 없어 고향에 내려가지 못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꾸준히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했으며, 서서히 미국과 영국 미술상들의 주목을 받았다.
1857년, 빵 한 조각 살 수 없을 만큼 궁핍한 생활을 하던 밀레는 간신히 생계를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1860년대 후반부터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며 화가로서 영광을 누렸고, 1869년에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평생 농사를 지은데다 궁핍에 시달려 극도로 몸이 쇠약해진 밀레는 이 영광을 오래 누리지 못했다.
1870년, 밀레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파리 코뮌의 혼란을 피해 바르비종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1년 후 다시 바르비종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에는 건강이 나빠져 그림을 거의 그리지 못했으며, 바르비종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묻혔다.
어떠한가?
밀레는 후기 인상주의 최고의 거장 고흐가 스스로 자신의 스승은 밀레라고 말했듯이 인상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27세의 백색피부와 홍조를 띈 뺨 그리고 슬픔에 찼던 눈빛의 청년 밀레, 그의 육십년 인생의 발걸음이 다음세대인 거장 반고흐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보라.
지금 당신의 발걸음이 후대의 누군가에게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보면 어떨까?
보이지 않던 것이
점점 보이게되는 전환점.
모든 삶의 마디가 전환점으로 변하고
걷는 길의 걸림돌이 디딤돌로 변하는 기적.
그로인하여 눈물과 웃음이 한바탕되는 날이다.
우수(雨水)의 지혜를 배울 때다.
#밀레, 〈이십 대 자화상〉, Self-Portrait ,1841, 캔버스에 유채, 63.5x47cm, 보스턴 미술관.

#오늘문득
#우수 #雨水
#장프랑수아밀레 #이십대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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